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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사 가는 길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123
임동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2년 12월
평점 :
품절
운주사,
머리 속에 떠올려보면 산 속에 폭 박힌 하나의 배처럼, 편안함을 연상시킨다.
운주사.
한자어로는 운주사(雲住寺)다. 구름이 머무는 곳. 구름이 사는 곳. 즉 천상의 존재가 지상에 내려와 머무를 수 있는 곳. 이는 민중들이 소망하던 유토피아, 무릉도원이었으리라.
그런데 나는 운주사 하면 다른 한자어가 연상된다.
운주사(雲舟寺)!
구름배!
지상의 존재들을 천상으로 이끌어가는 곳. 지상에서 천상으로 초월을 할 수 있는 장소로서 운주사를 생각한다. 그리고 운주사 경내에 들어서면 마치 배 속으로 들어온 것처럼 포근해지고, 어디론가 떠난다는 느낌을 받는다.
시집 제목이 "운주사 가는 길"이다.
운주사에서가 아니다.
아직 운주사에 도착하지 않았다.
따라서 시인의 인식은 구름이 머무는 곳,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와 지상의 존재들을 위무해주는 장소에 도착하지 못하고 있다. 도착을 해야 다시 지상에서 천상으로 갈 수 있는데 말이다.
운주(雲住)에서 운주(雲舟)로!
운주사에 전래되어 내려오는 이야기, 황석영의 "장길산" 서두 부분에 나오는 운주사에 대한 이야기, 천불천탑의 이야기는 곧 민중들의 소망이다. 민중들은 운주사에 오길 바랬고, 운주사에서 세상을 뒤엎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너무도 이른 첫닭의 울음소리는 민중들의 소망을 뒤로 미루게 했으니...
시인은 운주사에 가려고 한다. 다시 민중들의 소망을 담기 위해서.. 민중들의 소망과 한이 서린 그곳으로.
따라서 이 시집을 지탱하는 힘은 기억의 힘이다. 그리고 나무와 같은 식물의 힘이다. 시인은 시집 곳곳에서 과거의 일을 이야기하고 있다. 자신의 현재를 만든 과거, 이것은 뒤로 가는 일이기도 하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동력을 얻는 일이기도 하다. 과거는 과거로만 존재하지 않고, 현재에서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는 힘을 얻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시인은 자신을 위로해주는 존재로 고향의 살구나무를 이야기하고 있다. 자신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있더라도 '고단하고 힘겨울 때면/언제든 안아주마, 다독여주는...'(내 고향집 살구나무 부분) 그러한 나무를 이야기하고 있다.
얼핏 생각해 보면 나무는 운주사에 대한 생각과 배치되는 듯한 느낌이 든다. 나무는 땅에 뿌리를 굳건히 박고서 제 자리를 지키면서 제 소임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무는 우리들이 안식할 수 있는 고향같은 존재이고, 고향을 잃었을 때 민중들이 갈 수 있는 곳이 어디일까 생각해 보면, 그곳은 민중들이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곳, 운주사이지 않을까 생각을 하게 된다.
즉, 땅에 굳건히 자리잡은 나무는 우리의 아름다웠던 과거를 상징한다면, 이제 그 뿌리를 잃었으니 우리는 찾아가야 한다. 우리가 살 수 있는 곳으로. 그것이 비록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일지라도.
우리는 아직 운주사에 도착하지 못했다. 운주사는 아직도 우리에게 진행형이다.
첫닭 우는 소리
- 운주사 가는 길1
그리고 비밀한 그 골짜기 속에
이미 바깥에서 모두 저버리고
안으로만 대피해온 사람들
다급히 새 왕국을 세우고자 했네
그러나 정사(情死)의 뒤끝처럼
미처 상호(相好)를 가다듬고
법의 하나 제대로 음각할 틈 없었던
조급한 욕망의 흔적들만을
여기에 어지러이 남겨놓았네
그랬다네, 그들은 가장 은밀한 곳에
숨겨둔 돛배 한 척 가득히
창칼에 상한 육체들을 실어나르며
하루 낮과 밤 사이에 천불천탑을 세우려
돌을 쪼개고 힘든 목도질 나섰다네
하지만 원수 같은 첫닭 우는 소리에
제 어미 품에 깃들이지 못한 축생들
얼굴이 으깨어지고 심장이 터져
무더기로 떼죽음당해갔다네
더러 창자가 꾸역꾸역 기어나오고
사지가 갈갈이 찢겨나간 채
그 격정의 강물에 떠가기도 했다네
그리하여 절정의 시간 후에 엄습하는
허무처럼 그곳은 한 발 내밀면
절벽인 나락의 숲으로 남았다네
끊임없이 슬픔의 항해를 재촉하던
아흔 굽이 죽음의 기항지였다네
임동확, 운주사 가는 길, 문학과지성사,2000년 5쇄. 첫닭 우는 소리 전문
시인이 광주 출신이고, 젊은 시절, 우리나라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었다는 전기적인 사실을 고려하면 이 시는 다르게도 읽힌다. 단지 운주사에 얽힌 이야기로만 읽히지 않는다. 죽음의 기항지, 우리에게도 연상되는 곳이 있지 않은가. 이젠 죽음의 기항지가 아니라, 새 삶의 기항지로서, 출발지로서 역할을 해야 하는 곳이기도 하고...
이제 운주사는 운주(雲住)가 아니라 운주(雲舟)였으면 한다.
이 시집에서 지금도 이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 시가 있다. 그가 누구인지 역사를 아는 사람은 쉽게 짐작할 수 있으리라. 임동확의 시들이 대부분 길어서 이 시는 부분만 인용을 한다.
그는 죽어서도 명령하고 있다
그는 분명 죽어 나갔는데, 그것도 처참하게
그가 믿었던 심복의 저격을 받아서.
.......(중략)
그리하여 이젠 과대망상의 망나니가
영영 이곳에서 추방된 줄 알았는데
대체 어떤 곡절로 관료들의 거수 경례를 받고
선량한 광장의 시민들을 붙박이게 하는가
......(중략)
정녕 그 누구도 원하지 않았지만
그런데도 그는 끈질기게 남아
오늘도 우리들 생각들을 통제하고 있다
...... (생략)
임동확, 운주사 가는 길, 문학과지성사, 2000년 5쇄. 그는 죽어서도 명령하고 있다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