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열정
수잔 손택 지음, 홍한별 옮김 / 이후 / 2005년 11월
평점 :
품절


원래 제목이 "토성의 영향 아래"란다. 토성의 영향이란 우울, 느림 등을 의미한다고 하고. 벤야민에 대한 글의 제목인데, 이렇듯 손택은 벤야민을 좋아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벤야민은 우리에게도 잘알려진 사람이기도 하고.

 

손택의 읽기를 빌려 다른 작가들에 대해서 읽는다. 어떨 때는 쉽고 재미있게, 어떨 때는 너무도 어렵고 지루하게...

 

폴 굿맨, 리펜슈탈, 지버베르크, 카네티, 아르토에 대해서 들어본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서양문학과는 거리가 먼 나는 이들을 수전 손택을 통해서 처음 접하게 되었다. 그러니 나는 손택의 눈을 통해서 이들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이중의 굴절.

 

손택이 한 번 굴절 시킨 작가들을 내가 또 한 번 굴절시키고 있다. 이것이 작가들이 하고자 하는 본질에 얼마나 다가갈 수 있을까? 아니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그 무엇이 반드시 진실이고, 또 작품의 본질일까?

 

아니리라. 작품의 본질은 결정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작가에 따라서, 또 독자에 따라서 시대에 따라서 변한다. 고정된 형식으로 존재하지 않고, 유동적인 가소성이 있는 존재로 작품은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러므로 손택이 읽은 작품을 손택의 눈을 통해 읽어도 나는 손택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니 받아들일 수가 없다. 비록 그 작품을 읽지 않았다고 하여도 손택의 주장에 비판적인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작품을 읽고 내 생각을 정립한 다음, 손택의 글과 비교를 해보면 더 좋겠지만 그럴만한 능력은 되지 않으니, 손택의 읽기를 따라가되, 내가 받아들이는 것은 손택의 읽기 방법이다. 그리고 그 읽기 방법을 통해 내 읽기 방법을 정립해가는 것.

 

다행히도 벤야민과 바르트 정도는 어느 정도 읽어서, 이 부분을 재미있게 읽었다. 역시 배경지식이 있어야 읽기가 쉽다. 그러니 배경지식이 전혀 없는, 그런데도 난해하다고 손택도 인정하고 있는, 게다가 이 책에서는 분량도 가장 많은 아르토에 대해서는 도무지 뭔 소린지 하면서 읽었고... 초현실주의와 비슷하나 초현실주의도 아닌 사람이 아르토라고 하니...

 

아르토에 대한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손택은 이렇게 말한다.

 

극도로 지루하거나 도덕적으로 끔찍하거나 읽기에 너무나 고통스러운 작품에 대해, 그 작품의 진정한 본질에 대해서는 거의 말해주지 않는 (때로는 심지어 감추기까지 하는) 재미난 사실들을 논함으로써 그 작가를 고전으로 만든다. 어떤 작가들은 읽히지 않기 때문에, 본래 읽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문학적, 지적 고전이 된다. (수전 손택, 우울한 열정, 이후 2009. 237쪽)

 

아르토를 통독하는 사람에게, 아르토는 지독하게 멀리 있는, 도무지 흡수할 수 없는 목소리고 존재이다. (수전 손택, 우울한 열정, 이후, 2009. 238쪽)

 

결국 이 논의를 보면서 나는 아르토란 사람의 작품에 흥미를 지니는 일을 포기했다. 흥미를 지녀봤자 머리만 아플 따름이라고 먹지 못하는 포도를 신포도라고 한 여우를 따라한다.

 

하지만, 어쩌면 이런 손택의 아르토 읽기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난해하다는 '이상'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한 번쯤은 정독하면서 조용히 이상에 대해 생각해봐야겠다는 도전의식은 생긴다.

 

손택의 글들, 참 다채롭다. 읽어도 질리지가 않는다. 천천히, 찬찬히 읽어볼 필요가 있는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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