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참 넓다는 생각을 한다. 비가 올 때면.

내가 살고 있는 곳은 파란 하늘에 간간히 하얀 구름이 떠다니고, 아직 날은 더웠는데, 남부지방에는 집중 호우가 쏟아졌다고 하니...

 

작은 나라라고 생각해왔는데, 비로 인해 우리나라의 넓음을 새삼 느끼게 되고... 하긴 어딜 가도 많은 사람들 때문에 우리나라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시내 어디를 가도 사람이 많은데, 고속도로에 가면 또 차도 많고, 이름난 곳이 아니더라도 어디 좀 쉴만한 곳을 찾아가면 또 왜이리 사람이 많은지, 여기에 외국에 나가보아도 한국 사람은 도처에 있다. 이러니 우리를 누가 작은 나라라고 하겠는가.

 

2주가 넘게 모든 매체에서 올림픽, 올림픽했는데, 이제는 외국의 견제를 받을 만큼 큰 나라가 되었다고 느낄 수 있는 그런 스포츠활동이 이루어지기도 했고... 물론 매체에서 이야기하는 선진국형 운동으로 바뀌었다고 하는데, 선진국형 운동이란 내 생각에는 모든 국민이 언제 어디서든 어떤 운동이든 큰돈 들이지 않고 할 수 있을 때라고 생각하고, 아직은 거기에 미치지 못하니, 선진국형 운동이라고 하기보다는 우리나라가 많이 컸다는 의미로 쓰면 될 것이고...

 

이렇게 커버린 나라에서 이제는 문화 쪽에도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는데... 물질문명 또는 돈되는 문화만이 아니라, 겉으로 화려해 보이는 문화만이 아니라, 우리네 삶을 풍부하게 하는 문화, 그런 쪽으로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는데...

 

그런 일환으로 시 쪽에도 관심을 가지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대학들이 돈되는 과학 쪽에는, 법학, 의학, 공학 쪽에는 투자를 많이 하면서도 인문학은 경시하고, 과학 중에서도 순수과학 쪽은 등한시하고 있다는데, 진짜 큰나라가 되려면 순수과학, 순수학문, 인문학 이런 쪽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천민자본주의, 졸부 이런소리를 듣지 않겠지.

 

이제는 아침 바람이 제법 선선하다. 무더위에 시집을 읽기 시작한 지도 좀 되었는데...

 

시집이 꽂혀 있는 책꽂이를 죽 훑어보다 김영무의 시집을 골라 들었다. "가상현실"

 

일명 '시물라시옹'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이 시집은 사이버세계를 이야기하지 않고, 자신의 삶에서 보지 못하고 있었던 세계를 암이라는 요소로 인해 보게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시에서도 나오지만, 암은 진단이 아니라 선고라고, 이는 사람의 삶을 과거와 단절시키고, 새로운 세계를 보게 만드는 선고다.

그래서 암은 우리를 가상현실로 인도한다. 지금까지 나와 함께 있었지만, 나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세계가 내 눈에 펼쳐지고, 암으로 인해 이제와는 다른 세상을 경험하게 된다.

 

과거의 세계뿐만이 아니라, 현재의 세계도 다르게 다가오고, 미래의 세계도 다르게 다가온다. 그러나 시인은 암에 굴복하지 않는다. 이러한 가상현실에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희망을 찾는다.

 

이 시집의 장점은 그것이다. 암을 회피하지 않는다. 암 선고를 처녀수태 고지를 받은 마리아와 동일시한다.(시 마니피카트 1-3 참조) 그리고 받아들인다. 그 다음부터는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이것을 이 시집에서는 귀향이라는 표현으로 난 이해했다. 사람은 죽음에서 태어나 삶을 살다가 다시 죽음으로 돌아간다. 즉 사람에게 귀향이란 죽음인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귀향이란 늘 새로운 아픔'(시 '수술'에서)이고, '어이없게도 우리들 이불 속으로 / 파고 들어와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 갓난 죽음'(시 '난처한 늦둥이'에서)라고 한다.

 

그의 시 귀향은 이러한 인식을 잘 드러낸 시라는 생각이 든다.

 

귀향

 

귀향을 종용하는 다정한 바람

구름들의 손짓

이제 배를 돌려야 하리

 

고물에 가슴 기대고

지나온 물길 되돌아본다

 

뱃머리 돌리지 마라

그냥 가자.

고향은 떠나기 위해 있는 곳

내친 김에 하늘 끝에 걸려 있는

물금 넘어가자

 

김영무, 가상현실, 문학동네, 2001. 귀향 전문

 

여기서 고향은 우리가 삶을 유지해왔던 곳이다. 그리고 고향을 돌아보는 지나온 물길은 우리가 살아온 나날들, 모습들이다. 그렇지만 시인은 뱃머리를 돌리지 말라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은 떠나기 위해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내친 김에 물금 넘어가자고 한다. 이것이 또다른 귀향이다. 자신의 원초적인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

 

시인이 이렇게까지 죽음을 생각하고 자신의 삶을 생각하고 의지를 지니고 있는데, 이 시집의 2부인 울루루도 죽음과 연관이 된다. 아니, 삶의 의지와 연관이 된다. 시인은 귀향을 꿈꾸고 있지만, 이는 무력한 순응이 아니다. 가기까지 최선을 다해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래서 사막 한가운데 커다랗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다는 호주의 바위산 울루루는 시인의 모습이 투영된 존재이다.

 

시인은 이런 울루루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삶을 생각한다.

 

시인이 이야기하는 예언자를 보자. 예언자가 항상 인정을 받지는 않았지만, 오늘날 이런 예언자들을 우리는 너무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마치 카산드라의 예언처럼.

 

오늘의 예언자는

 

오늘날의 예언자는 누구인가

 

물이 썩었다고

쌀에 독이 들었다고 짜장면에도 라면에도 국화빵에도

유전자조작 밀가루가 스며들어 있다고

공기에 독극물이 숨어 있다고

내장재 바닥재에 환경호르몬이 잠복해 있다고

우리나라에서 유통되는 정체불명 화학물질

3만7천 종에 2억3천만 톤에 이른다고

이 가운데 유독물 유통량 해마다 100만 톤씩 늘어난다고

살충제 농약 배기가스 제초제로

우리들의 살림터 속고갱이까지 썩었다고

전자파가 어린 뇌세포 서서히 죽이고 있다고

 

광야에서 외치는 오늘의 선지자는

유방함, 폐암, 대장암, 혈액암, 간암 선고받은

모든 암환자들이다

일급수 아니면 살지 못하는

산천어 열목어 같은 암환자들이야말로

오늘의 이사야, 예레미아이다.

 

김영무, 가상현실, 문학동네, 2001. 오늘의 예언자는 전문

 

이런 시들과 더불어 마지막 4부는 세계화 시대를 통렬하게 풍자하고 있다. 김지하의 담시를 읽는 것처럼 굿의 형식을 빌어 세계화가 우리에게 어떤 문제를 주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지금은 단지 세계화를 넘어서 FTA로 대변되는 자유무역협정들이 난무하는 세상이 되었으니 말이다. 이 시는 장시다. 그래서 읽을수록 내용이 정리가 된다. 장편 굿시라고 하는 "세계화 블루스" 읽을 만하다. 너무 길어서 인용은 못하겠다. 

 

어쩌면 이 "세계화 블루스"도 오늘의 예언자 취급을 받지는 않았는지...

아직은 늦지 않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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