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흐리다. 무더위가 조금은 꺾이는 듯하다. 계속해서 시집을 읽고 있는 중.

 

시는 노래다. 이 말에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시는 이야기다.” 그러면 무슨 소리하느냐고 다시 한 번 쳐다보는 사람은 많다. 그만큼 시는 노래와 가깝고, 이야기라고 하면 시를 통해 대표되는 운문이 아닌, 주저리 주저리 말을 풀어내는 산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는 말 그대로 말을 압축해서 표현하는 갈래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기에, 사람들이 “시는 노래다.”는 말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시는 이야기다.”하면 갸웃거리게 된다.


그런데도 “시는 이야기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이들도 시는 노래라는 말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것을 전제로 시에도 이야기가 있다고, 시도 이야기처럼 쓸 수 있다고 할 뿐이다.

그런 시를 우리는 ‘이야기시’라고도 하고 ‘리얼리즘시’라고도 하며, ‘단편서사시’라고도 한다.


아마 이 논쟁이 일제시대 때 임화의 시부터 시작되었을 텐데...

임화 시에 나오는 그 이야기성은, 우리에게 시를 한 편의 이야기로 읽을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게 임화의 시에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일제시대 우리나라의 풍습을 우리말로 잘 표현했다고 알려진 백석 시에도 이러한 이야기성이 잘 드러나 있다. 그의 시 “여승”은 한 편의 이야기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이런 점을 보아도 시에는 노래의 요소도 이야기의 요소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인이 어느 쪽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이야기성이 강한 시와 노래 쪽에 가까운 시로 나뉠 수 있을 뿐이다.


난 이야기시의 대표로 최두석의 시집을 꼽는다. 서정춘의 시집 제목이 “죽편”이었다면 최두석의 시집 제목은 “대꽃”이다. 둘 다 대나무를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면, 서정춘의 대나무는 개인적이고 서정적이라면, 최두석의 대나무는 역사적이고 현실적이며 집단적이다.


또 서정춘의 짧막한 시들이 ‘노래’ 쪽에 가깝다면, 최두석의 시는 이야기 쪽에 가깝다. 아니, 본인은 이야기시를 쓴다고 직접 이야기한다.


그가 시집의 자서(自序)에서 밝힌 다에 의하면 그의 시는 이야기라 해도 좋다.

이 시집에 수록된 상당수의 작품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 내가 실화에 얽매이는 것은 이 질퍽거리며 끈적거리는 흙을 떨쳐 버릴 수 없는 것과 같이 느껴진다.

최두석, 대꽃, 문학과지성사. 1989년. 3쇄 자서에서


처음 에 나는 아무 생각없이 이 자서를 읽었을 때 실화를 설화로 읽었다. 그만큼 이 시집에는 설화적인 요소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다시 한 번 자서를 보았더니, 그 조그마한 글씨가 세상에 설화가 아니라 실화다. 실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시를 썼다고 시인이 아예 처음부터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하긴 설화도 우리들이 있어왔다고 믿거나 우리의 의식을 규정한 이야기로서 어느 정도는 실화로 받아들여지기도 하니, 그게 그거라고 생각해도 좋겠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말은 노래보다는 이야기에 중심을 두고, 우리의 마음보다는 뇌에, 이성(理性)에 호소하겠다는 이야기다.


하여 시집의 첫 시가 바로 노래와 이야기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시이다. 이 시는 시인이 자서에서 한 말을 시로써 보충해주고 있다. 다음부터 나올 시는 그래서 이야기에 중심을 두고 읽으란 얘기로 받아들여도 된다.

노래와 이야기


노래는 심장에, 이야기는 뇌수에 박힌다

처용이 밤늦게 돌아와, 노래로써

아내를 범한 귀신을 꿇어 엎드리게 했다지만

막상 목청을 떼어내고 남은 가사는

베개에 떨어뜨린 머리카락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

하지만 처용의 이야기는 살아 남아

새로운 노래와 풍속을 짓고 유전해 가리라

정간보가 오선지로 바뀌고

이제 아무도 시집에 악보를 그리지 않는다

노래하고 싶은 시인은 말 속에

은밀히 심장의 박동을 골라 넣는다

그러나 내 격정의 상처는 노래에 쉬이 덧나

다스리는 처방은 이야기일 뿐

이야기로 하필 시를 쓰며

뇌수와 심장이 가장 긴밀히 결합되길 바란다.

 

최두석, 대꽃, 문학과지성사, 1989년 3쇄. 노래와 이야기 전문


우리가 겪어온 험난한 세월을 시인은 노래로써 심장으로써 느끼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면 견디지 못한다고 한다. 이미 노래로 다스릴 수 있는 상처는 아니기에. 그렇기에 이야기로 상처를 다스리려 한다. 뇌수는 곧 이성의 힘이다. 이성의 힘으로 차분히 분석하고, 힘을 키우고, 변혁을 이루어야 한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개인의 심장만 울리지 않는다. 이야기는 이곳저곳으로 퍼져나가, 시대를 불문하고 퍼져나가 사람들의 머리 속에 남는다. 그랬었지. 그랬었어. 그렇군.  그래야겠어 하게 한다. 이것이 이야기의 힘이다. 시인이 추구하는 시의 힘이다.


이 힘이 대나무로 나타난다. 대나무로 의인화되어, 우리 앞에 나타난다. ‘대꽃’이란 연작시다. 이 시집에는 1부터 8까지의 대꽃 시가 있다. 주로 동학 혁명을 다루고 있고, 대꽃의 마지막으로 오면 4.19가 나온다. 우리의 역사, 민중의 힘이 대나무로 등장한다.


대꽃 8

- 대꽃


  이루어진 지 스무 해쯤 되어 보이는 대숲에는 삼십대의 상인도 오십대의 품팔이도 들어가 섰읍니다. 철 모르는 어린이도 섞였읍니다. 대숲이 출렁거리더니 일제히 전진하기 시작했읍니다. 서걱이는 행진의 걸음마다에 외마디 외침이 폭발했읍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귓속으로 파고드는 이 소리는 종로에서 광화문으로 곧장 달려갔읍니다. 소리가 부딪친 전방 바리케이트에서는 돌연 총포가 난사되었읍니다. 이에 대나무들은 쓰러지며 대꽃을 피웠어요.


한 송이 피면

또 한 송이 거품 뿜으며 피고

이꽃 저꽃 저꽃 이꽃 우르르우르르 무리져 피는

피다가 모두 죽은

대꽃. 


최두석, 대꽃, 문학과지성사, 1989년 3쇄. 대꽃․8 전문

(80년대 후반에 맞춤법이 개정되어 ‘-읍니다’는 모두 ‘-습니다’로 바뀌었다. 그래도 시인이 쓴 표기를 존중하여, ‘읍니다’로 그냥 표기한다. 혹 개정판이 나왔는지는 모르겠는데, 이는 시의 내용이나 시의 표현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기에 아마도 개정판이 나온다면 모두 ‘습니다’로 바꿀 것이라 생각하지만)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이 시에 4.19의 모든 것이 들어있는 것을. 이 대꽃들이 몇 십년 뒤에는 찬란한 촛불로 다시 피어오르게 됨을... 아직도 진행형임을...


또 이 시집은 고은이 쓴 “만인보”의 전신이라고 할 만큼 시인이 알고 있던 실제 인물들이 시 속에 등장하여 우리네 삶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시집이기도 하다. 한두 명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 시집에 등장한다. 그래서 이 시집은 내용에서도, 소재에서도  리얼리즘시를 구현한 시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내가 갖고 있는 최두석 시인의 시집엔 이상하리만큼 “꽃”이란 낱말이 모두 들어가 있다. 그만큼 시인은 사람이 꽃처럼 피어나는 세상을 그리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참고로 그 시집들을 이야기하면 이 “대꽃”을 비롯하여, “성에꽃”,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 “꽃에게 길을 묻는다”다. 안치환의 노래를 빌리지 않더라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세상, 우리가 만나야 할 세상 아니던가.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