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다, 더워. 이 말도 이제는 상투어가 되어 버렸다. 같은 말도 자꾸 하면 효력이 떨어지는데...이제는 더위를 몸이 받아들여야 하는지... 더위에 계속 시집을 읽고 있다. 어쩌면 이 여름이 가기 전까지는 계속 읽을 수밖에 없으리라.

 

이 더위에 방학을 생각한다.

만약 방학이 없었다면 학생은 어떻게 지낼까? 나는 학생 때 방학이 없었다면 견딜 수 있었을까? 내 어릴 때는 여름이 견디기 더 쉬웠다. 젊어서였을까? 여름엔 놀 거리들이 풍부했고, 해는 길었으며 우리는 힘이 넘쳐났다. 더위 쯤이야 땀 한 번 뻘뻘 흘리고, 냇가에 가서 물에 한 번 풍덩 들어갔다 나오면 됐는데... 그래도 방학이 없는 학교는 상상도 하기 싫었다.

 

하지만 지금, 아이들에게 방학이 있는가? 방학 때 더위를 식힐 만한 곳이 있는가? 또 놀 시간이 있는가? 밖에 나가보면 학원을 마치고 나오는 아이들, 학원으로 가는 아이들, 그리고 길가에 주욱 늘어서 있는 학원 차량들이 보인다. 이 아이들에겐 방학도 공부를 할 수밖에 없는 기간이구나. 하여 이 아이들은 방학을 이중으로 받아야 한다. 학교에서 하는 방학과 학원에서 하는 방학.

 

덥다고 공부를 안 할 수야 없지만, 적어도 방학기간 만큼은 다른 경험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밖에 능소화가 지천으로 피어 있다. 이상하다. 예전에는 잘 보이지 않던 능소화가 요즘은 왜이리도 잘 보이는지... 여름이면, 아니 여름이 되기 전부터 여름까지 능소화는 그 주황색의 꽃을 우리게에 보여준다.

 

담장을 넘어서든지, 아니면 가로수 옆을 타고서든지, 예전엔 양반꽃이라고 했다던데... 양반이 국민의 대다수가 되고, 이제는 아예 없어진 사회를 반영하는지, 우리에게 이 능소화는 잘 보인다. 그래 야안과 상민이 어디 있고, 꽃 중에 양반꽃이 어디 있어.

 

길을 걷다가 능소화를 보고 눈이 즐거워지고, 더위를 잠깐 잊기도 한다. 이 더운 여름에 저 꽃들은 그래도 잘 버티고 있구나. 나도 버텨야지 하면서.

 

윤재철의 "능소화"란 시집을 펼치다. 반성 시리즈 두 권을 읽었더니... 갑자기 학생들이 생각이 나고, 풍요로움 속의 비루함을 가장 잘 구현하고 있는 집단이 학생들 아니던가. 윤재철 시인이 교사라는 생각과, 예전에 이 시집에서 매우 많은 학교 관련 시들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펼쳐보다.

 

그래 방학이란 본래 학교를 놓아버리는 기간인데... 학생들은 학교를 놓아버리되, 학원을 놓아버리지 못했고, 이들은 공부와 비슷하지만 공부는 아닌 공부를 하느라 이토록 고생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 

 

시집에는 시인의 개인적인 체험도, 생각도, 서정도 담겨 있지만, 학생에 중점을 두고 읽은 이 시는 2부가 압권이다. 우리나라 학교의 모습이 시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래 이게 바로 학교다. 이게 바로 우리 교육현실이다. 

 

획일화, 경쟁, 생각 하지 않음, 통제, 일방적 지시 등등.

 

다양성, 협동, 생각 함, 자율, 토의와 토론을 통한 일처리 등등은 사라지고 없다. 참 암울한 모습이다. 이 암울한 모습 속에서 시인은 그래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고 한다. 제도를 바꾸려고 투쟁하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지만, 그래도 이 아이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준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한다.

 

하여 오히려 그런 시들 속에서 우리는 교육 현실이 잘못되었음을, 반드시 바뀌어야 함을 인식하게 된다. 슬픈 교육현실, 그 현실을 더위 속에서도 피어나 자신의 모습을 알리고 있는 능소화란 제목의 시에 담고 있다. 그래서 슬프다. 덥다. 그렇지만, 꽃은 피어나고, 학생들은 자라난다. 덥다고 나가떨어지지 않고, 물방울 하나 떨어뜨려 주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교사 아니던가.

 

이 시에 나타난 학교 현실을 보자. 우선 시험 때 이런 학생이 있다.

'중간 고사 수학 시험지 받자 마자 / 쭉 한번 훑어보더니 / 번호 이름 쓰고 그냥 엎드려 잔다'('지성이' 1-3행) 특별한 아이인가. 아니다. 학교에서 시험 때면 볼 수 있는 흔하디 흔한 모습이다.

 

여기에 '교문 지도 하는데 / 한 녀석이 반은 사복이고 반은 교복인 채 / 가방도 없이 쓰레빠만 신고 들어오길래'(겁먹은 송아지 1-3행) 이런 학생도 있고,

'공부하는 놈들은 처음부터 젖혀 두고 / 힘자랑 하는 놈들끼리 / 서로 다른 중학교 출신들끼리 / 불알을 늘어뜨리고 눈 부라리며 / 뿔싸움을 한다'(각축 2연)고 학기 초면 어김없이 벌어지는 순위 정하기 싸움이 있으며,

'환호작약 해방/ 더러는 이리 튀고 저리 튀며 / 식용유 붓고 밀가루 뿌리고 / 교복을 찢는다'(졸업식 2연)고 뉴스에도 나왔던 졸업식 모습도 보이고,

'학교에는 1,710개 번호가 산다네 / 컴퓨터도 이름은 모른다네 / 단지 오엠알 카드 까맣게 칠한 / 번호로 1,710명 얼굴을 기억한다네 / 학교에는 번호들이 하루 종일을 모여 산다네'(번호들의 세상 마지막 연)이라고 익명으로, 이름으로 존재하지 않고 번호로 존재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이름이 아닌 번호로 지내는 아이들, 비대화된 학교의 비인간적인 모습 아니던가. 우리는 작은 학교를 추구해야 하는데,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작은 학교을 없애려고 하는 모습은 교육과는 배치되는 모습 아니던가.

 

이 밖에도 학생부에 끌려와 부모님이 빌고 있는 모습과 머리카락을 왜 단속하는지 모르겠다는 아이들, 매점에서는 살아있는 아이들, 수능 때 몇 십만의 아이들이 똑같은 자세로 대기하고 있는 그 비인간적인 모습이 이 시에 잘 나타나 있다. 그렇다고 시인은 이것들을 어떻게 고치자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는 이 사실들을 사실적으로 우리에게 교사인 시적 화자의 눈을 통해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때로는 본다는 것이 큰 힘을 발휘할 수도 있다. 보여지길 꺼려하는 것들을 보여주는 일, 이 또한 시인의 일이 아니겠는가. 자, 어떻게 바꾸어갈 것인지는 우리 몫이고, 시인은 이런 학교의 현실을, 생들의 모습을 우리에게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지금 아이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시 한 편. 과연 이것이 아이티 강국의 모습일까. 생각해 보자.

 

내공

 

휴대폰을 늘 손에 달고 다니며

틈만 나면 귀신 같은 손놀림으로

자판 눌러대는 아이들을 보면

엠피 쓰리 귀에 꽂고 볼펜 돌려가며

시험 공부하는 아이들을 보면

내가 허전하다

 

도무지 혼자 있지 못하는 아이들

아이티 상품이 없으면 젖꼭지 빼앗긴 듯

외롭고 쓸쓸한 아이들

수염은 거뭇거뭇 덩치는 코끼리만 한 녀석들이

손바닥보다 작은 아이티 기기 속에 파묻혀

없다

 

옛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농경 문화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만 안테나 달고

도무지 내공이 없는 아이들을 보면

아이들이 허전하다

이 문명이 참으로 허전하다

 

윤재철, 능소화, 솔, 2007. 내공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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