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삼매경. 이런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책을 읽어도 더위를 잊기 힘들다. 인간의 정신이 육체를 초월하고, 극복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것도 어느 정도지, 폭염이라고 하는 이런 날씨에는 몸이 먼저 늘어져버리고 만다.

 

그렇다고 몸에게 나를 온전히 맡겨버리고 내 정신을 잃을 수도 없는 일.

 

예전에 샀던 시집 중에서 마음에 드는 시집들을 하나씩 꺼내 읽어 보기로 한다.

 

어쩌면 더 잘된 일인지도... 시란 언제나 가까이에 두고 읽어야 하고, 되새겨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책장에 제 자리를 잡고, 내게 다가오지 않았던 시집이 한두 권이 아니었으니, 이 기회에 하나씩 하나씩 다시 내 곁으로 불러내고, 내 맘 속에 담아두려 한다.

 

이번엔 정호승이다. 그가 2004년에 펴낸 "이 짧은 시간 동안"

 

일명 슬픔의 시인. 그는 기쁨보다는 슬픔에 더 관심을 가지고, 이 슬픔을 통해 기쁨에 이르려고 한다.  하여 그가 시에서 다루고 있는 대상들은 밝고 높은 대상이 아니라, 어둡고 낮은 대상들이다. 그러나 이런 대상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어서 오히려 우리에게 힘을 주고 있다.

 

그의 시에 안치환이 곡을 많이 붙였다. 노래로도 많이 불려지고 있는데... 몇 년 전에 서강대에서 열린 안치환 콘서트에 정호승 시인이 나와 자신의 시를 낭송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

 

이번 시들은 단지 낮고 힘들고 슬픈 대상을 넘어서고 있다. 무언가 포용하고, 융합이 되고 있다는 느낌. 그래서 시집에서는 불교와 기독교의 만남이 나오고, 아버지, 어머니 얘기가 나오고, 수미산이든, 십가자든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있다. 

 

어느 시를 읽든 마음이 따뜻해진다. 잠시 더위를 잊는다. 그리고 이 무더위에 더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생각하게 된다. 함께 이 무더위를 이겨낼 수 있기를...

 

이 시집에 있는 '꿈속의 꿈'이라는 시를 보면 우리는 자신이 짊어진 짐을 가장 무겁다고 여기고 남들의 짐은 자신의 짐보다 가볍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결국 자신의 짐은 자신이 질 수밖에 없고, 자신의 짐만큼 남들의 짐도 무겁다는 사실을 인식하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짐을 짊어지지 말고 안고 가라고,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라고 하고 있다. 어디선가 들은 듯한 이야기를 그는 시를 통해 이야기 하고 있다.

 

꿈속의 꿈

나를 못 박을 무거운 십자가 하나 등에 지고 / 여름산을 오른다 / 조금만 발걸음을 멈추어도 누가 채찍을 내리친다 / 목이 마르다 / 무릎을 꺾고 땅에 쿠 십자가를 내려놓는다 / 한 여자가 달려와 발길로 물그릇을 차버린다 / 사방을 둘러보아도 / 내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갈 사람은 보이지 않고 / 어디선가 그분의 말씀이 들린다 / 십자가를 등에 지고 가지 말고 품에 안고 가라 / 나는 얼른 그분한테 달려가 무릎을 꿇는다 / 십자가를 좀 바꾸어주세요 / 도저히 무거워서 지고 갈 수가 없어요 / 그가 빙긋이 웃으면서 나를 어느 숲으로 데리고 간다 / 숲에는 누가 버리고 간 것일까 / 크고 작은 수많은 십자가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 이 중에서 마음에 드는 걸 하나 골라보렴 / 나는 그분의 말씀대로 이것저것 몇날 며칠 고르다가 / 가장 작고 가벼워 보이는 십자가를 하나 골라 / 등에 지고 다시 산을 오른다 /여전히 십자가가 무겁다 /등이 휠 것 같다 / 몇걸음 떼어놓지 못하고 다시 쿵 십자가를 내려놓자 / 그분이 조용히 내게 다가와 말씀하셨다 / 그 십자가가 원래 네가 지녔던 바로 그 십자가다

정호승, 이 짧은 시간 동안, 창비. 꿈속의 꿈 전문(114-115쪽)

 

자, 이쯤되면 지금 내가 짊어진 짐을 짐으로만 여겨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어짜피 나와 함께 할 십자가라면 안고 가야 한다. 기꺼이... 윤동주가 말했던 것처럼. 그러면 이 때 십자가는 그의 시 '벽'에 나와 있는 구절처럼(내리칠수록 벽이 되던 주먹을 펴 / 따스하게 벽을 쓰다듬을 뿐이다 / 벽이 빵이 될 때까지 쓰다듬다가 / 물 한잔에 빵 한조각을 먹을 뿐이다 / 그 빵을 들고 거리에 나가 / 배고픈 이들에게 하나씩 나눠줄 뿐이다) 짐에서 빵이 될 수 있다.

 

이런 삶. 이제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이다. 순간, 이 짧은 생의 순간. 우리는 최선을 다해 우리의 짐(벽)을 빵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아마도 이 시집의 제목이 되었을 시.

 

물 위를 걸으며

 

물 속에 빠져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고 물 위를 걸으면

물 속에 발이 빠지지 않는다

 

물 속에 빠져

한마리 물고기의 시체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하고

물 위를 걸으면

물 속에 무릎이 빠지지 않는다

 

그러니 사랑하는 이여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주어진

물 위를 걸어가는

이 짧은 시간 동안

 

물 속에 빠지지 않기를 바라지 말고

출렁출렁 부지런히 물 위를 걸어가라

눈을 항상 먼 수평선에 두고

두려워하지 말고

 

정호승, 이 짧은 시간 동안, 창비, 2005 5쇄, 물 위를 걸으며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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