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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 ㅣ 교양 교양인 시리즈 4
박석무 지음 / 한길사 / 2003년 10월
평점 :
정약용을 모르는 우리나라 사람이 있을까? 정약용만큼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실학자가 있을까? 아마도 박지원 정도... 서로 다른 길을 간 사람임에 틀림없는데... 왜 이들은 만나지 않았을까 했더니... 이 책을 읽고 만날 수 없었음을 알 수 있었다. 둘의 길은 엄연히 달랐으므로...
박지원은 에둘러서 시대를 비껴갔다고 할 수 있다면, 정약용은 정면으로 시대를 맞서 갔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만날 수가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명문거족 출신으로 과거를 일찌감치 포기하고,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는 연암과, 과거 공부에 폐단이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자신의 뜻을 펼치지 위해서는 과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과거시험에 임하는 다산.
멀리서 세상을 바라보며, 세상에 쓴소리를 하던 연암과 세상의 한복판에서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하던 다산은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도 다른 세상에 살던 사람이었으리라. 다산의 집안이 어려웠을 거란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게 오해였다는 사실. 8대 옥당에 오른 집안, 이도 역시 명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단지 이들은 당시 세를 잃은 남인 계열이었다는 사실이 정약용의 집안을 몰락한 집안이라고 생각하게 만들고 있지 않나 싶었다. 몰락한 집안이 아니라, 정약용 아버지도 벼슬살이를 한 나름 명문 집안인데 말이다.
어쩌면 정약용의 삶을 정리하는데는 3부작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보면 3부작이 아니라 2부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 그의 삶은 2부작이고, 나머지 생은 에필로그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번째는 그가 벼슬살이를 하던 때, 이 때를 1부작이라고 한다면 두번째는 유배생활을 하던 때, 이 때가 2부작이다. 그리고 해배가 되어 자신의 고향에서 말년을 보낼 때 이는 인생의 3막이 아니라, 그냥 2막에 이어서 펼쳐지는 뒷이야기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분량을 보아도 그렇고.
그렇다면 다산의 삶은 벼슬살이를 하던 젊은시절과 유배생활을 하던 중년의 나이에 절정을 맞이했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배워야 할 삶도 이 시기에 걸쳐 있고...
그의 벼슬살이는 정조라는 임금에 의해서 결정이 되어진다. 정조가 없었다면 다산이 자신의 뜻을 펼치는데는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정조의 후원하에 승승장구하던 다산은 정치를 통해 자신의 이상을 펼치려고 한다. 이를 아렌트의 용어로 하면 행위에 나아간 것이다. 자신의 전존재를 걸고 정치에 참여하는 행위. 공적인 장에 나아가는 모습.
하지만 우리에게 다산이 다산으로 남아있는 이유는 행위자로서의 다산이 아니라, 판단자로서의 다산이다. 행위가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 그는 사유,의지의 단계를 지나 판단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 자신의 정치 행위를 사유하고, 판단하게 되고, 세상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게 되는 시기에 이른다. 이것이 바로 유배자로서의 다산이고, 우리가 만나게 되는 실학자로서의 다산이다.
한 걸음 물러나 있을 때, 무언가 세상을 읽을 수 있는 눈이 더 깊어지고 넓어질 수 있을 때, 그 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무르익은 사상을 책으로 펴내는 일이다. 자신의 사상을 정리해내는 일이다. 이러한 정리는 유배생활 18년이란 세월이 있었기에 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유배생활을 통해 농익은 그의 사상이, 그의 책으로 엮어지고, 이 책들이 우리를 다산에게 이끌고 있다. 운명이란 때론 엉뚱한 방향에서 더 큰 역할을 하게 하기도 하는데, 아마도 다산의 경우가, 그의 형인 손암 정약전의 경우가 이렇지 않을까 싶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정조가 더 오래 살아서 이들이 정치의 영역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면 아마도 우리는 지금과 같은 그들의 저서를 만나보지 못했으리라. 이렇게 우연한 방향에서 이루어진 그의 유배생활이 지금껏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자양분으로 남아있으니, 이는 그를 행위에서 판단으로 이끈 운명의 바람이라고 해야 할 듯하다.
다산의 생애를 이토록 자세하게 치열하게 따라가면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책을 만나보기는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시작 부분에서 김남주의 시가 나오는데, 이 시부터 호기심을 자극하고, 곳곳에 나오는 다산의 글과 시들이 우리를 다산에게 더 가까이 가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다산학이라는 이름으로 다산연구를 하고 있다는 사실과 이 다산학이 현실과 동떨어진 학문의 세계에서 노니는 것이 아니라, 다시 현실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학문이라는 사실. 현실로 돌아와야만 다산학이라고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맑스가 했다는 말. 세상을 해석하기만 해서는 안되고, 세상을 변혁해야 한다는, 다산이 행위에서 판단으로 나아갔다고 했지만, 이는 순차적인 개념이 아니고, 판단을 통한 행위로 다시 되돌아와야지만 인간의 삶이 풍요로워진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혼돈의 시대. 솔직히 지금, 다산과 같은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다산을 지금 이 시대에 다시 불러내어야 하지 않나?
아니, 다산을 그리워만 하지 말고, 우리가 다산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 책은 우리에게 우리 모두가 다산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