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어리 장갑
오탁번 지음 / 문학사상사 / 2002년 11월
평점 :
품절


이 시집이 아닌 다른 시집에서, 또는 다른 글에서 오탁번의 시를 본 경우가 많다. 시의 내용이 어렵지도 않고ㅡ 또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구나 하는 시들이 많았는데...

 

학자이기도 한 시인은 학자연하는 시를 쓰지 않는다. 그의 시에는 우리네의 삶이 녹아들어 있다. 읽으면서 우리는 우리네 삶을 재인식하게 된다.

 

이 시집에서도 시의 화자가 어린아이이기도 하고, 시인 자신이기도 하고, 나이 든 사람이기도 하다.  어린 화자가 등장하는 시는 따뜻한 분위기를 풍기고, 절로 웃음이 나오게 하고 있으며, 시인 자신이기도 한 화자가 등장하는 시에서는 시인과 연결지어 시를 읽는 재미가 있다. 나이 든 화자가 나오는 시는 삶의 연륜이 묻어나는 시들이 있고.

 

이 중에 '굴비'란 시. 우리나라 민담에서 차용한 이 시는 웃음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이 시의 해설에 나와 있듯이 눈물을 끌어내기도 한다.

 

얼핏 '굴비'란 시에 나오는 상황은 웃음을 유발한다. 그런 상황, 소위 음담패설이라고 하는 종류의 글을 읽을 때 나오는 웃음과 연관이 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그 시의 상황 속으로 들어가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슬픔을 자아낸다.

 

웃기는 상황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음에, 그럼에도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음에 슬픔이 밀려오게 된다. 시인은 그런 슬픔을 따스한 시선으로 감싸주고 있다. 남편과 아내의 행동을 통해 그런 상황에서도 사랑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나 해야 할까.

 

그래서 이 시집의 겉표지에 나오는 문장이 이 시집의 시들을 잘 대변하고 있단 생각이 든다.

 

"정겨운 인간의 사랑과 천진함이 묻어나는 순수한 서정시"

 

이 말이 딱 맞다.

 

우리의 어린 시절부터 어른이 된 시절까지 이 시집에는 다양한 내용이 실려 있고, 이들이 따스함을 잃지 않으면서 펼쳐져 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시들이다.

 

제목이기도 한 시 '벙어리 장갑'을 보자.

 

벙어리 장갑

 

여름내 어깨순 집어준 목화에서/마디마디 목화꽃이 피어나면/달콤한 목화다래 몰래 따서 먹다가

어머니한테 나는 늘 혼났다/그럴 때면 누나가 눈을 흘겼다/-겨울에 손 꽁꽁 얼어도 좋으니?

서리 내리는 가을이 성큼 오면/다래가 터지며 목화송이가 열리고/목화송이 따다가 씨아에 넣어 앗으면/하얀 목화솜이 소복소복 쌓인다/솜 활끈 튕기면 피어나는 솜으로/고치를 빚어 물레로 실을 잣는다/뱅그르르 도는 물렛살을 만지려다가/어머니한테 나는 늘 혼났다/그럴 때면 누나가 눈을 흘겼다/-손 다쳐서 아야 해도 좋으니?

까치설날 아침에 잣눈이 내리면/우스꽝스런 눈사람 만들어 세우고/까치설빔 다 적시며 눈싸움한다/동무들은 시린 손을 호호 불지만/내 손은 눈곱만큼도 안 시리다/누나가 뜨개질한 벙어리장갑에서/어머니의 꾸중과 누나의 눈흘김이/하얀 목화송이로 여태 피어나고/실 잣는 물레도 이냥 돌아가니까

 

어린 시절 이야기. 따스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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