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너, 우리 - 차이의 문화를 위하여
뤼스 이리가라이 지음, 박정오 옮김 / 동문선 / 199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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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다음 장면들은 차이를 인정하는 모습일까, 아니면 차별이 교묘하게 나타나는 모습일까?

 

장면 1

학교 출석번호. 분명히 한 반에 남녀가 모여 있는데,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출석번호를 정할 때 아무런 고민도 없이 남자가 1번부터 시작하도록 하고, 여자는 남자 아이들 뒤를 이어서 번호를 매긴다. 모든 일이 컴퓨터로 처리되어 굳이 남녀를 분리해도 되지 않는데... 관행이 습관으로 굳어지고, 이게 당연한 문화가 되어 이제는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당연스레 행해지고 있다

 

장면 2

연말 이러저러한 대상 시상식. 어느 방송이나 대부분은 남자 한 명을 사이에 두고 여자 두 명이 나온다. 이상하게도 주요 진행은 가운데 남자가 하고 양 쪽의 여자들은 보조 진행자란 인상을 준다. 21세기 이제는 뉴스에서도 남녀가 거의 동등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연예 활동에서는 아직도 이러한 남성 중심주의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장면 3

예전 어느 대선 때 이야기. 예전이라고 해봤자 그리 오래 전 얘기도 아니다. 한 10년 됐나? 모 여성후보가 대권후보로 나오자 여성계가 양분되었다. 이념을 떠나서 여자 후보가 나왔으니 이 후보를 지지하자는 측과 어떻게 이념을 떠나서 지지하냐는 측으로. 결과는? 뭐... 지금은 단지 여성 후보라는 이유로 그 후보를 지지해야 한다는 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그동안에 대선후보까지는 아니더라도 서울시장 후보로는 여성 후보가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제는 여성이냐 남성이냐가 아니라, 어떠한 정책을 지니고 있는냐로 쟁점이 모아지고 있다.

 

장면 4

미스코리아, 기타 무슨무슨 아가씨 선발대회. 아직도 하고 있는 대회가 많은데... 텔레비전에서는 중계를 하지 않고 있다. 이유는, 여성을 상품화한다는 것. 그런데 아직도 무슨 아가씨 대회를 만들자는 사람이 있나 보다. 무슨 아가씨보다는 그 지역을 대표하는 사람을 뽑아야 하지 않나? 그런데, 그런 대회가 의미가 있나? 지역 홍보를 위한 수단일텐데...

 

장면 5

시에서 가끔 말하는이를 찾을 때 너무도 단순하게 둘로 나눈다. 기다림의 정조가 강하고, 소극적이며, 수동적인 화자가 나오면 여성적 화자, 당당하고 적극적인 화자가 나오면 남성적 화자. 그래서 김소월, 한용운의 시에 나오는 화자들은 대부분 여성적 화자라고 하고, 이육사, 유치환의 시에 나오는 화자들은 대부분 남성적이라고 한다. 과연 그러한가? 여성의 특징이 수동적이고 소극적이며 애상적인가? 꼭 여성만 그러한가?

 

장면 6

다시 학교. 평가를 하는데, 음악과 미술은 남녀 구분없이 평가를 한다. 절대평가인 셈. 그런데 체육에서는 남자의 기준과 여자의 기준이 다르고, 그 기준에 따라 평가를 한다. 가끔 남학생들이 볼멘 소리를 한다. 우리는 여자에 비해 미술, 음악 실력이 모자라는데, 왜 이 두 과목은 똑같이 평가를 하고, 체육은 우리가 잘하는데, 기준이 다르냐? 다 다르게 하든지, 다 같이 해야 하지 않냐고.

 

여기서 이리가라이의 책이 빛을 발한다.

 

1987년부터, 평1989년까지 발표되었던 글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각 편의 끝부분에 년도가 적혀 있다.

짧막한 글들이지만 여러가지로 생각할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을 뭉뚱그려서 말하면 평등이란 같음을 추구하지 않고, 다름을 추구한다는. 그래서 이 책의 부제가 '차이의 문화를 위하여'이다. 여성이 여성해방운동을 하는데, 이는 자칫하면 남성의 자리에 자신을 놓는 운동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고 이리가라이는 주장한다.

 

여성은 여성다움을 추구하고, 남성은 남성다움을 추구하되, 이는 사람다움이라는 공통분모 앞에서 행해져야 한다는. 그래서 남녀의 차이를 부정하지 말고, 남녀의 차이를 인정하되, 그 지점에서 서로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즉 상대는 극복되어져야하는 대상이 아니라, 나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대상이어야 한다. 그래서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무시하는 운동이 아닌, 차이를 인정하는 운동이어야 한다고 한다.

 

참 어려운 일이다. 여성성, 남성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사람다움을 찾아가야 한다니. 그래서 이 차이가 차별이 아니라, 공생이 되어야 한다니 말이다. 이런 논점을 지니면 장면6이 이리가라이의 주장에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함께 할 수 있는 일은 함께 하되, 엄연한 차이가 나는 일은 다르게 해야 한다는.

 

이러한 생활이 어렸을 때부터 몸에 밴다면 차이는 차별로 나아가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남녀는 서로가 배타적인 집합이 아니라, 서로가 함께 하는 교집합을 많이 지니고 있는 두 집합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이를 인정하고 여기에서 남녀가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한다.

 

이리가라이 책, 꼼꼼하게 읽을 필요가 있다. 이 책의 논조를 받아들이면 단순히 남녀간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다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점에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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