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에 관한 기사가 신문에 나면, 어김없이 다음에는 그 기사 내용에 관한 논쟁이 실린다.
어떤 형태로든, 정부의 발표는 여러 논의를 유발하고, 또 다른 시민단체에서 발표를 하면 또다른 논의를 유발한다.
정답은 없다고 하지만, 이렇게까지 저마다의 정답을 지니고 있는 분야가 있을까?
그래서 교육은 해결되지 않는 화두다. 아니 화두 자체가 개인의 깨달음을 전제로 하지 똑같은 깨달음을 유발하지는 않으니, 교육을 화두라고 하면, 교육을 개인에게 맡겨두는 꼴이 되는 셈인가.
그렇다해도, 화두란 깨달음이고, 이 깨달음 자신의 깨달음이지만, 깨달은 사람이 많을수록 좋은 세상임은 확실하다. 그러므로 교육은 우리에게 영원히 끝나지 않는 화두여야 한다.
다만, 이 화두를 붙들고 정진해야 한다는 사실만은 잊지 말아야 한다.
몇 년전부터 우리나라 학생들에게는 집중이수제라는 제도가 생겼다. 한 학기에 8과목 이상을 듣지 말라고 법으로 정해놓았다. 학생들의 과중한 학습을 막는다는 취지에서.
좀 우습기는 하다. 학원에서 10시, 아니 11시까지 학습을 하고 오는 아이들에게 기껏 6시간 정도 공부하는 학교의 학습이 과중하니 과목을 줄이라니...
그래서 각 학교는 학기당 8과목으로 과목을 축소했다. 끽소리 못하고.
이 결과 전학생들이 커다란 곤란에 처하게 됐다. 도대체 자신은 이미 한 학기 배우고 간 과목이 그 학교에서는 아직 시작도 안 해 또 배워야 하는 처지가 되었고, 다음엔 자신은 배우지도 않는 과목이 그 학교에서는 이미 끝나 배울 기회가 없게 되는 경우가 생긴 것.
이걸 해결한다고 방학 때 특정한 학교를 지정해 그 학교에서 얼마 간 수업을 받으란다. 뭐야, 과중한 학습부담을 줄여주겠다고 집중이수제 한다더니, 방학 때도 나와서 들으라고?
좋은 제도가 다른 뒷받침없이 실시되었을 때 나타나는 부작용이 한꺼번에 터져나오고 있는 셈.
여기에 얼마 전에는 절대평가를 실시하겠다고 한다. 반발도 심하고, 찬성도 많고. 우습지 않나. 왜 절대평가가 반발에 휩싸여야 하지. 교육은 목표가 있고, 그 목표에 도달했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수단이 바로 평가 아닌가? 그렇다면 평가는 절대평가여야 하는데... 이는 특목고, 자사고를 살려주려는 꼼수라는 비판이 타당성을 얻고 있는데, 왜 그런지 생각해봐야 하지 않나?
한 가지 정책이 다른 정책과 연결되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부작용 두 번째가 바로 절대평가.
또 교과교실제라는 제도가 있는데, 지금껏 우리는 학년 반이 있고, 그 반에서 수업을 받아왔는데, 이제는 교과교사들이 상주하고, 학생들은 이동을 해서 수업을 받으라고 하는 제도. 얼핏보면 대학교의 제도와 비슷한데, 문제는 교실도 없고, 학생들도 자신의 의지로 교과교실을 선택하지 못하고, 선택당하는 처지라는 점.
다른 정책과 동떨어진 정책이 나타낼 수밖에 없는 부작용 세 번째가 바로 이 교과교실제.
민들레 78호를 읽었다. 이번 호를 읽으면서, 이번 호의 특집이 공간에 관한 문제였는데, 집중이수제, 절대평가, 교과교실제가 이 공간의 문제와 겹쳐서 떠올랐다.
왜, 한 번에 해결할 수 있지 않나. 우선 학교의 공간을 재배치해야 한다. 꼭 교실들이 똑같을 필요가 있을까? 지금과 같은 크기를 꼭 유지해야 하나? 교실 두 개를 세 개로 만들 수 있지 않나? 그렇다면 현재 교실이 30개 정도인 학교는 45개로 늘어날 수 있는데, 이를 교과교실로 활용하면, 교사들이 모두 자기만의 교과교실을 가질 수 있지 않나?
여기에 한 가지 더, 복도를 지금과 같은 일자형의 복도가 아닌 교실과 어울리는 다른 형식으로 만든다면 교실은 더 나올 수도 있을테고, 학생들의 만남의 장소이자 휴식의 장소가 될 수도 있을텐데.
교실 문제를 학교의 공간 재배치 문제와 연결지어 해결한다면, 다음은 집중이수제. 이는 당연히 무학년제로 가야 한다. 중학교 3년이라면, 3년 동안 들어야 할 필수과목만 정하면 된다. 그 과목을 어느 학년에 듣던 상관이 없어야 한다. 학생이 한 학기에 8과목 그러면 6학기니까 3년에 48과목만 들으면 된다. 이를 자신이 듣고 싶어하는 교과교실에 있는 교사를 찾아가 들으면 그만이다. 1학년, 2학년, 3학년 편의상 학년은 정해두겠지만(대학처럼 말이다) 듣고 싶은 과목을 듣게 되면, 전학을 가도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그 학년에 꼭 들어야 한다는 과목이 각 학교에 없을테므로.
그럼, 자연스레 절대평가로 넘어간다. 교과교실에서 자신만의 수업을 준비하고, 자신만의 목표를 제시하는 교사가 특정수준을 넘어선 학생을 통과시키고, 수준에 미달되었다면 더 듣게 하는 방향이 되기 때문이다. 전체 학년이 똑같은 시험 문제로 평가를 해서, 그걸 가지고 절대평가니, 상대평가니 하는 방법은 이 체제에서는 자연스레 사라지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 학교는 공간이 아니라, 이번 호에 실린 이문재의 말처럼 장소가 된다. 함께 지내면서 함께 나누는 공간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되었을 때 학교는 민주적인 공간이고,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장소가 된다.
덧말
이번 호와 관련지어서는 헤르만 헤르츠버거의 건축수업과 리텔마이어의 느낌이 있는 학교건축을 함께 읽으면 좋다.
이제 학교는 획일화된 공간의 상징이어서는 안된다. 학교는 다양성을 나타내는 곳이어야 한다. 이번 호에 나온 말이 가슴에 와닿는다. 사람이 집을 만들지만, 집도 역시 사람을 만든다는 말. 사람이 학교를 만들지만, 학교도 사람을 만든다. 어떤 학교여야 하는가, 참 중요한 문제다.
여기에, 중학교 교사가 학생이 고등학교에서 수학할 능력이 있는지 판단해서, 진학여부를 결정해야 하고, 고등학교 교사가 이 학생이 대학교에서 수학할 능력이 있는지 판단해서 진학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하지만 대학 서열이 남아 있는 한 이 논의는 공염불에 불과할 수도 있다. 왜 절대평가가 특목고, 자사고에 유리한지 다들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고교등급제를 완전히 폐지하도록 정책을 유지한다면, 교과교실제를 통한 집중이수제, 그리고 절대평가는 학교 교육을 바꾸는 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