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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라, 우리가 이곳에 있음을 - 칠레, 또 다른 9.11
살바도르 아옌데.파블로 네루다 외 지음, 정인환 옮김 / 서해문집 / 2011년 9월
평점 :
품절
가슴 먹먹한 책이다.
미국에서 일어난 9.11 사태 10주년이라고, 또 다른 9.11이 예고되었다고 세계가 호들갑을 떤 지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
"기억하라, 우리가 이곳에 있음을"이라는 책이 나왔다. 이런, 칠레에서 아옌데 정권이 피노체트의 군부 구테타로 붕괴된 날짜도 9.11이었다니..
9.11 또다른 사건은 없을까? 고종석이 엮은 히스토리아란 책에서는 9월 11일을 어떤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을까 하고 찾아보았더니, 이런 이 책에서 9월 11일은 칠레에서 아옌데 정권이 무너진 날을 기억할 만한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책이 몇 년도에 나왔더라 2003년인데... 미국의 9.11이 2001년에 일어났는데, 이 책의 저자는 그 때까지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건으로 칠레의 9.11쿠테타를, 그리고 그 중심에 서 있었던 아옌데라는 사람을 꼽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의 9.11을 기억하는 현대인들에게 칠레의 9.11은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린 과거의 사건일 뿐이다. 아니, 과거의 사건이어야 한다. 과거의 사건이게 한다. 선거로 정권을 잡은 아옌데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자칭 민주주의 국가라는 미국이 어떤 일을 했는지 드러내기가 싫기 때문이다.
미국의 9.11은 적을 선명히 규명하며, 미국의 가치를 수호하고, 미국을 정당화하기 위한 계기가 될 수는 있어도, 그래서 자꾸 9.11을 기억하게 해야 미국의 가치에 반하는 집단을 악의 축으로, 테러집단으로 규정할 수 있을테지만, 칠레의 9.11은 기억할수록 미국의 치부를 드러내기 때문에 기억하지 않게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 책의 영어 제목이 칠레, 또다른 9.11이듯이 우리가 기억 속으로 불러내야 할 9.11은 칠레의 9.11이다.
미국의 9.11은 우리가 불러내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불러내지고 있으며, 또 계속 불러낼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미국의 가치를 선전하는 매개체로 작동할 테지만, 칠레의 9.11은 우리의 5.18과 같이 자꾸 기억의 저편 속으로 밀어넣으려 할 가능성이 많다. 이를 드러내면 배후의 일들을 파헤쳐야 하는데, 이 배후가 파악되면 될수록 우리가 알고 있는 '자유', '민주'란 개념이 우리와는 다르게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자유. 민주'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자유와 민주'가 파괴되었는지, 억압되었는지 우리가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압력, 일명 저강도 전쟁이라는 그러한 압력으로 민주적으로 구성된 정부가 지속되지 못하는 상황, 지속하려고 하면 군부를 통한 쿠테타로 붕괴시키는 외부의 힘. 이런 것들이 칠레의 9.11을 기억 속으로 불러올수록 우리에게 선명히 드러나고, 그런 위험이 우리의 뇌리 속에 각인 될테니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며, 미국의 9.11을 떠올리기 보다는(물론 이 둘은 미국의 비호를 받던 사람이 물리력을 이용해 반인권적인 행위를 했고, 많은 사람들에게 잊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우리나라의 5.18이 생각났다.
압도적인 물리력의 차이를 자신들의 신념으로 끝까지 버텨냈던 사람들. 그 사람들로 인해 사회가 조금씩이라도 진보했음을.
마지막날 아옌데의 마지막 연설 마지막 부분.
인민 여러분, 스스로를 보호해야 합니다. 하지만 절대 희생되지는 말아주십시오. 저들에게 뿌리째 뽑혀선 안 됩니다. 대신 저들의 모욕을 참지도 말아주십시오. ... 머지않은 장래에 자유로운 인간이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당당히나아갈 드넓은 거리가 열리게 될 것임을 ... 저는 제 죽음이 헛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합니다. 최소한 제 죽음이 범죄자와 비겁자, 반역자는 처벌받아야 한다는 도덕적 교휸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40-41쪽)
마치 1980년 5월의 외침인듯이 들리는 이 목소리...
우리는 얼마나 5.18의 빚을 갚았나 생각해 봐야 한다. 그래서 이 책은 미국의 9.11과 겹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5.18과 자꾸 겹친다. 과거 먼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바로 얼마 전에 우리에게 일어났던 일로 생생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우리가 '자유, 민주' 이 말을 이 말의 쓰임에 맞게 사용하는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한다.
9.11과 관계 있던 사람들의 직접적인 증언이 있는 이 책... 우리가 이런 일들을 기억할수록 이런 일들은 반복되지 않는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다고 했지만, 반복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지 않게 하는 사람들의 노력이 반복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기억하자, 그들이 그 곳에 있었음을.
또 기억하자. 그들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이들이 있었음을.
우리는 이들에게 빚지고 있음을.
그래서 우리는 이들에게 갚을 빚을 '자유, 민주'의 이름이 제대로 쓰이는 사회를 만들어 갚아야 함을.
우리에게 이 책의 다른 이름은 칠레, 또다른 5.18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