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완성을 위한 죽음교육 - 교육과 미래 3 아로리총서 18
정재걸 지음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누군가 그랬다. 사람이란 삶과 앎이 결합된 즉 삶을 아는 존재라고. 

그래서 사람이라는 이름을 가진 동물로 태어났다고 해서 다 사람이 아니고, 삶이 무엇인지 깨닫는 순간 사람이 된다고. 그것을 우리는 다시 태어남, 또는 거듭남이라고도 하고, 해탈, 깨달음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렇게 삶을 알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대상이 죽음이다.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니고, 하나이기 때문이다. 원초적으로 존재하는, 즉 즉자로서의 하나가 아니라, 깨달은 하나, 즉 대자로서의 하나일 때 우리의 삶은 더욱 풍성해 진다. 

죽음은 무섭고 두려워서 피하려고 하는 존재로 우리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는데, 이 죽음은 무섭고 두려워하고 피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님을 깨닫는 순간, 그 순간에 우리는 죽음과 하나가 되고 우리의 삶은 더욱 풍성해질 수 있다. 

하지만 현대는 어떤가? 죽음을 한사코 피하고 감추려고만 하지 않나. 온갖 의료기술을 갖추고 조금이라도 생명을 연장하려 한다. 과연 생명이 연장되기만 하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이반 일리히는 병원이 병을 만든다고 했는데, 병원이 발달함으로써 평균수명은 늘어났지만 인간의 존엄성을 많이 훼손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 않은가. 그는 병원치료를 거부하고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였다는데, 그렇게 되기까지는 엄청난 성찰과 노력이 필요했으리라. 

이 책은 요즘 우리 교육을 비판하면서 우리 교육에서 죽음에 대한 교육, 또는 죽음 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죽음 교육을 통해 삶을 더욱 잘 알 수 있다는 부수적인 효과 외에도, 죽음 교육을 통해 죽음과 삶이 하나임을 깨닫고, 이 깨달음을 토대로 매일매일을 사람(삶앎)답게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하기 위해 과거의 교육방법을 설명하고, 현재에 이루어지고 있는 죽음 교육에 대해서도 소개를 하고 있다. 아주 작은 소책자이지만, 이 책에 담긴 내용은 결코 작지 않다. 글쓴이의 말대로 이 책에도 온우주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앞만 보고 달려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주위에 누가 있는지도, 자신이 왜 달려가는지도 모르는 채 무작정 앞만 보고 달려가고 있는 상태. 이 상태에서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찾을 수는 없고, 진정한 자신을 찾지 못하기에 삶이 무의미하다고 순간순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릴 때는 시간이 느릿느릿 가고, 어른이 되면 시간이 빨리빨리 간다고, 10대에는 시속 10킬로, 20대는 시속 20킬로, 40대는 시속 40킬로, 70대는 시속 70킬로 등등으로나이에 비례해서 시간이 속도를 낸다고 장난삼아 말하곤 하는데, 이는 어쩌면 죽음을 두렵고 피하고 싶은 존재로만 생각하기에 그런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시간은 우리의 의식에 따라서 다르게 움직인다고 생각하니, 죽음이란 삶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면 시간의 속도에 대한 이런 생각도 달라지지 않을까 한다. 

결코 쉽지 않은 책, 그러나 꼭 읽고 생각해야 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책을 교육에 관련된 책이라고 해서, 교사, 교수, 아니면 학생, 그것도 대학생 이상만 읽어야 된다고 생각하면 그것 자체가 잘못된 생각이다.  

죽음이 누구에겐 오고, 누구에겐 오지 않는 것이 아니잖은가. 그렇다면 어짜피 우리 모두에게 올 죽음을 우리 모두가 죽음에 대해서 아주 어려서부터 배우고 생각하고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죽음이 너무 어렵다면 영성(종교성)을 일깨우는 노력이라도 하자. 그리고 그런 노력을 하겠다는 생각이라도 하자. 그렇게 하려면 알아야 하지 않을까. 무섭다고 피하기만 해서는 안 되니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의 저자도 영성(종교성)교육의 필요성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다. 

적어도 이런 책을 읽어본 사람이 하나 둘 늘어난다면 물질만능에 빠진, 속도감에 빠진 사람들은 하나하나 줄어 가고, 사회는 좀더 풍요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로 넘쳐나게 되겠지 그런 꿈을 꾸어본다. 

이 책의 내용과 비슷한 내용인데, 다석 류영모는 한 해 한 해를 살지 않고, 한 날 한 날을 살았다고 한다. 내 나이가 몇 살이다가 아니라, 몇일을 살았다고 한다. 하루하루가 태어남과 죽음의 연속이었다는 얘기다. 그런 다석이 어찌 세상을 허투루 살 수 있었겠는가. 이런 다석의 삶을 생각하면서 이 책을 읽어도 좋다. 

문정희 시인의 시집 "남자를 위하여"에 실려 있는 '처음처럼'이란 시이다. 난 이 시에서 이 책의 내용을 느꼈다. 죽음은 언제나 친구처럼 내 곁에 있다는 내가 아는 척을 하지 않아도 늘 내 곁에 있다는, 그래서 아쉬움을 남기기 전에 내 삶을 충실히 살아야겠다는 그런 의미로 이 시를 읽었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 누가 몰랐으랴  / 아무리 사랑하던 사람끼리도 / 끝까지 함께 살 순 없다는 것을. 

진실로 슬픈 것은 그게 아니었지. / 언젠가 이 손이 낙엽이 되고 / 산이 된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언젠가가 / 너무 빨리 온다는 사실이지. 

미처 숨 돌릴 틈도 없이 / 온몸으로 사랑할 겨를도 없이 

어느 하루 / 잠시 잊었던 친구처럼 / 홀연 다가와 / 투욱! 어깨를 친다는 사실이지. 

(문정희, 남자를 위하여, 민음사  중 친구처럼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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