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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신명은 여자의 말을 듣지 않지
김이삭 지음 / 래빗홀 / 2024년 6월
평점 :
성주단지, 야자 중 ××금지, 낭인전, 풀각시, 교우촌
다섯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괴력난신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데, 괴력난신, 어렵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나, 그냥 귀신 이야기라고 하면 될 것을.
불가사의한 일들이 현실에서 벌어지고, 그것을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할 때 우리는 이를 귀신의 소행인가 한다. 귀신, 괴력난신.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존재. 아니 현실의 인간이 알 수 없는 존재.
현실의 인간이 알 수 없는 존재이기에 현실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일들을 해결하기도 한다. 아니, 현실에 좌절했을 때 우리는 다른 존재를 불러낸다. 도저히 내 힘으로 안 되기 때문에 다른 존재의 힘을 빌리려는 마음.
그러한 마음들이 귀신을 불러낸다고 보면, 이 소설에 나오는 귀신 또는 귀신과 비슷한 존재들은 모두 현실의 부조리를 해결하기 위한 한 방편이 된다.
‘성주단지’에서 주인공은 ‘저는 귀도 보고 신도 보았던 거예요’(42쪽)라고 이야기하는데, 이는 보이지 않는, 또는 알 수 없는 존재도 소중히 여기고 마음을 다해주는 사람에게 귀신의 해코지가 닿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때 귀신은 누굴까? 교제 폭력(데이트 폭력이라고 하는 말을 더 많이 쓰나?)을 행사하는 사람은 주로 남성이다. 단지 헤어지자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끝없는 괴롭힘을 당하는 여성들이 많다.
이런 여성들에게 교제 폭력을 휘두르는 남성은 귀(鬼)라고 할 수 있다. 귀신이다. ‘신’이라는 말을 붙이고 싶지는 않지만. 이런 귀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 누가 이 귀를 막아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누가 막아주는가? 도움은 외부에서 오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는 알지 못하는 존재의 도움을 받았다고 여겨지지만 이 알지 못하는 존재의 도움을 이끈 것은 바로 주인공의 행위다. 그러니 결국은 자신의 의지, 행동이 귀신을 물리쳤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주체성, 능동적 대응이 나머지 소설들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문을 열 수 없을 때 그 앞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문을 부수고 나오는 주인공. 이는 자신의 한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또 그 한계를 남들이 깨주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한계를 넘어서는 주체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 닫혀 있으면 열어야 하는데, 열쇠가 없다면 문을 부수면 된다. 그렇게 그들은 다른 세계에서 자신들의 세계로 돌아온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행동을 다른 존재도 보았기를... 문을 여는 방법이 하나만이 아님을 알기를 바라는 마음이 ‘세 사람의 마지막도 지켜보지 않았을까? 목검으로 문을 부숴버리던 모습을? 정말로 그러했다면, 아영은 소녀도 같은 방법을 쓰기를, 그곳에서 나오기를 바랐다.’(113쪽)는 표현으로 나타난다.
이 소녀는 아영과 친구들이 다른 세계에서 위기에 처했을 때 구해준다. 자신도 그쪽 세계로 넘어와 갇혀 있었으므로... 상대의 어려움을 알기에 힘이 되어주고자 했던 존재이기에, 아영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행동으로 그 소녀 역시 어려움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이런 연대 의식, 약자들의 연대 의식이 드러나는 소설이 ‘풀각시’다. 화려한 영화 뒤에 감춰진 다른 존재들의 고통. 그렇게 고통을 약한 존재에게 전가함으로써 자신들의 부귀영화를 누리는 존재들.
하지만 약자들은 그렇지 않다. 이들은 서로 연대한다. 다른 존재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고통받더라도 상대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행위를 한다. 알면서도... 아니, 알기에 더더욱. 이런 연대를 통해서 그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고통에서 구하게 된다.
‘살을 날린다는 것은 그 살을 맞는 것이기도 합니다. 남의 팔을 자를 때는 당연히 내 몸도 잘릴 것을 각오해야지요. 같은 팔이 잘리지는 않더라도 어딘가는 잘리기 마련입니다.’(229쪽)라는 말.
이렇게 자신이 아플 것을 알면서도 하게 되는 행위. 이것이 바로 연대다. 상대의 고통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기에. 이러한 연대를 통해 고통은 잊힐 수가 없다. 잊히지 않기에 이들은 타인의 고통에 무감할 수가 없다. 그래, 꼭 당사자이지 않아도 된다. 자신이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내어놓을 수 있는 존재들. 그런 존재들의 모습이 김이삭의 이 소설집을 통해 형상화되고 있다.
‘낭인전’도 마찬가지다. 변강쇠전을 비튼 소설인데, 옹녀가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는 주체로 등장한다. 그렇다. 늑대인간이든 유랑하는 사람이든, 그들은 그 사회에서 밀려난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열심히 살려고 해도 사회가 그들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둘째치고, 그들을 아예 없애려고 한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 그런 사회는 오래갈 수가 없다. 이는 ‘교우촌’이라는 소설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천주교 신자들을 탄압하던 조선 후기. 그 사회에서 천주교 신자로 살아가려는 사람들. 그들을 괴물 취급하는 사람들.
하지만 다름으로 괴물을 만들어내면 그 괴물에 먹히는 것은 결국 자신들일 수밖에 없음을 소설은 ‘천주께서 저희 마을을 정말 가련히 여기시나 봅니다. 특히 굶주리는 아버지를요.’(276쪽)라는 말에서 알 수 있다.
다른 존재를 괴물로 취급하고 밀어내려고 하는 것은 결국 자신이 괴물임을, 따라서 자신 역시 파멸할 수밖에 없음을 깨달아야 하는데,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에서 여성들은 그러한 점을 잘 안다.
하여 여성들은 내 안의 괴물을 키우지 않는다. 남들이 괴물이라고 여기는 존재가 괴물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러면서 괴물을 만들어낸 사회에 저항한다. 홀로 또 함께...
이렇게 이 소설집은 괴물을 만들어내는, 즉 괴력난신이든 귀신이든, 그러한 존재들을 만들어내는 존재는 사회에서 권력을 쥔, 남들의 고통 위에서 자신의 영화를 좇는 이들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약자들이 연대를 통해서 또 자각을 통해서 괴력난신에서 벗어나 삶의 당당한 주체가 됨을 보여준다.
주체로 서는 여성들의 모습. 이 소설집을 통해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