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린다. 

  겨울이면 당연히 눈이 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겨우내 눈이 한번도 오지 않으면 이상하고 섭섭하다.

  눈이 우리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역할도 하지만, 눈은 다른 식물들에게도 물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흔히 강수량이라고 하는데, 이 강수량이 부족하면 우리뿐 아니라 자연도 고통을 겪는다. 강수량은 강우량과 강설량을 합쳐 부르는 말이니까, 겨울엔 눈이 와야 한다.


  그런데 눈이 오면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생계에 지장을 받는 사람들, 몸이 불편한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생계에 큰 지장은 없더라도 출퇴근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이동할 때 미끄러질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싫어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린 시절을 생각해 보면, 눈이 오면 마냥 좋았다. 많은 것을 눈으로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눈싸움, 눈사람 만들기, 눈썰매 타기 등등. 또 하얀 눈 위에 자신의 발자국을 남기는 일은 또 얼마나 재미있었던가. 남의 발자국을 그대로 따라가기도 하고. 이렇게 어린 시절의 눈은 싫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시간의 문제 아니었을까? 어린 시절, 무엇을 급하게 할 이유가 없다. 눈이 오면 그냥 놀면 된다. 바쁘게 해야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또 어린 시절은 시간이 느리게 간다. 시간이 많다. 그러니 급할 일도 없다. 


여유있게 느리게 시간을 즐기니 눈이 오든 비가 오든 해가 쨍하든 날이 흐리든 어떻게든 놀거리를 찾아낸다. 그리고 논다. 이것은 바로 여유에서, 느림에서 왔다. 그 느림이 나이들어가면서 점점 빨라진다. 여유는 줄고, 시간은 빨라진다. 더 빨리 하기 위해 길은 도로가 되고 꼬부랑길은 쭉 뻗은 직선 도로가 된다. 길을 가는 존재가 사람이라면, 도로를 가는 존재는 자동차다. 


자동차는 느리게 갈 수가 없다. 최근에 많은 도시에서 최고속도를 시속 50킬로미터 이하로 제한하고 있다. 빠름이 사고를 많이 일으키니 조금 느리게 가면 여유가 생기니 사고가 줄지 않을까 해 펼치는 정책. 실제로 사고율이 많이 낮아졌다고도 하고. 특히 어린이 보호구역, 노인 보호구역에서는 그 속도를 더 늦추기도 하니까. 이런 속도를 다들 지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실제로 도로에 나가보면 그 제한속도를 지키는 차들은 별로 없다. 물론 단속카메라 앞에서는 잘도 지킨다. 빠른 시대에도 범칙금(과태료 등등)을 내지 않고 빠르게 가려고 하니까. 시내 도로도 그런데 고속도로로 가보면, 제한속도 카메라 앞에서만 지키는 차들이 대부분이다. (내가 잘못 알고 있다면 그건 참 좋은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느리게-상대적으로- 살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이는 빠름이 대세인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시대에 눈은 반갑지 않다. 느리게 가게 할 뿐만 아니라 사고를 유발하기도 하기 때문인데... 그런데 이런 사고가 꼭 눈 때문일까? 눈이 오면 더 천천히 가라고 그렇게 경고를 하지 않는가. 천천히, 느림을 받아들이면 사고를 줄일 수 있는데... 그런 느림을 참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 아닌가. 그러니 책임을 눈에게 지우지 말자. 


눈이 내리면 잠시 쉬라는 거구나, 조금 늦게 여유있게 가라는(하라는) 거구나 하면 되는데, 현대인의 생활이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고 있다. 


유홍준의 시집을 읽다가 '눈'을 떠올리고, 느림과 여유<->빠름과 조급함을 생각했다. 바로 이 시가 그런 생각을 하게 했는데, 발상이 기가 막히다.


  아스팔트 속의 거북


이 아스팔트 밑에 거북이 산다

분명하다 갑골의 등짝처럼 딱딱한 이 길바닥이

저렇게 쩍쩍 금이 간 것은

원칙을 지키지 않은 공사 탓이

아니다 짧고뭉툭한 발목에 질끈 힘을 주고

끙차, 아스팔트 속의 거북이 등짝을 밀어올렸기 때문

확실하다 초과적재한 저 화물차의 중량 탓이

아니다 저 균열, 거북의 등을 보라

이 비루먹은 길들을 다 갈아엎을 심산으로

해안이 가까운 남해나 거제

해남이나 진도의 캄캄한 밤에

아스팔트 속으로 제 대가리를 밀어넣었을 거북!

이 망할놈의 나라 도로 곳곳을

오늘도 롤러를 단 공사용 차량이 다진다

갈라 터진 길바닥에 새 아스콘을 붓고 다진다

아스팔트 속의 거북 수천 마리가 떼죽음, 압사를 당한다


유홍준, 나는, 웃는다. 창비. 2007년 초판 3쇄. 56쪽.


논바닥이 가뭄에 말라 땅이 갈라지면 거북이 등처럼 갈라졌다고 하는 표현은 봤지만, 도로 위 아스팔트가 갈라진 것을 거북이 등으로 표현하다니... 도로, 빠름의 대명사. 거북, 느림의 대명사. 둘의 기묘한 대조. 우리의 생활이 느림을 용납하지 못함을 이렇게 '거북 수천 마리가 떼죽음' 당한다고 표현하고 있으니. 이것이 현대인의 생활이지 않을까. 도로의 이런 상황을 부실공사, 과적으로만 보지 말자고, 그것은 빠름을 추구하는 우리 생활이 일으킨 문제라고. 이런 상황이니 '눈'도 좋을 리가 없다. 하여 유홍준의 이 시를 읽다가 눈을 생각하고, 내 생활이 너무 빠름과 조급함으로 치우치지 않았는가 반성하기도 한다.


이밖에도 이 시집을 읽으면서 '그의 흉터''문 열어주는 사람'이 묘한 짝이구나 했는데, 이 두 시를 통해 시인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꽁꽁 감추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감추고 있는 것 또는 갇혀 있는 것을 드러내고 꺼내주기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여기에 마음이 포근해지는 '천국 가는 길'이란 시도 좋았고, '아교'라는 시도 마음에 들었다. 그러다 '벌레 잡는 책'을 읽으면서는 낄낄거리기도 했고, '북천'이란 시를 읽으며 왜 서정주의 '동천'이란 시가 떠오르지, 나중에 두 시를 연결해 봐야지 하는 생각도 했으니.


여러모로 읽기에도 좋고 생각도 할 수 있는 그런 시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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