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덩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3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지음, 정보라 옮김 / 민음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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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덩이' 별로 긍정적인 느낌을 주는 말이 아니다. 사람이 빠지는 곳. 물이 고이는 곳. 그래서 정체되는 곳. 이 소설 제목인 구덩이는 그러한 의미도 있겠지만 우선은 건축을 위한 '터잡기'라는 의미도 있다.


즉 건물을 올리기 전에 땅을 파서 토대를 마련하는 것. 그것은 새로운 존재를 만들기 위한 기초 작업이기도 하다. 그런데 하다가 제대로 안 되면 어떻게 되는가? 구덩이를 터로 삼아 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는 집, 자신들의 삶을 꾸려가는 생활 공간이 마련되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을 빠뜨리는 함정으로 작동할 수가 있다.


이 정도로 제목은 이중적인 의미다. 번역자가 러시아 용어를 어떤 말로 번역을 할까 고민을 했다고 하는데, 충분히 이해가 된다. 우리는 우선 구덩이라는 낱말을 보면 함정을 먼저 생각하지 터를 생각하지는 않으니까.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프롤레타리아들이 살 곳을 마련하기 위해 터를 마련한다. 구덩이를 판다. 여기에 노동자들이 참여해서 그들의 미래를 꿈꾸며 일한다.


러시아 혁명. 세계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고 하고 싶지만,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기 보다는 지식인 또는 혁명가들의 혁명 아니었나 싶은데... 러시아에서는 아직 진정한 프롤레타리아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프롤레타리아의 의식을 깨우칠 필요가 있었으며, 대다수를 차지했던 농민들을 어떻게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동참하게 할 것인지도 과제였을 것이다.


이 소설에서는 노동자 집단과 농민 집단이 나온다. 구덩이는 노동자 집단의 이야기이고, 집단 농장은 농민 집단의 이야기다. 여기에 이 소설에서 주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보셰프와 치클린, 그리고 프루셉스키는 이 두 집단 모두와 관련되어 있다.


이들에 더해 이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소녀 나스탸를 언급해야 한다. 나스탸는 러시아 혁명의 미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나스탸가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구덩이를 잘 파야 하고, 이 구덩이에 건물을 잘 올려야 한다. 단순히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 세대가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기사인 프루셉스키는 여러 고민을 하지만 그럼에도 구덩이를 제대로 파서 미래 세대를 위한 좋은 건축을 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는 프롤레타리아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많은 고민 속에서 헤맨다. 늘 죽음을 생각하지만 실행은 하지 못하는 관념에 빠져 허우적대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그가 그나마 긍정적인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은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또 소설의 뒷부분으로 가면 소녀들을 가르치러 가는 장면에서이다. 지식인도 혁명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이 있음을, 그러한 일을 해야함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이들의 미래는 그리 밝지 않다. 왜냐하면 다른 집단을 죽이거나 추방하는 것으로는 통합이 이루어질 수 없고, 그 갈등은 불안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안은 상대를 악마화하게 되고, 결코 화합할 수 없게 만든다. 전쟁 때 입은 부상으로 다리를 잃은 자체프는 일을 할 수가 없는데, 그는 자신의 정당성을 내세워서 다른 사람들에게서, 특히 부패한 관료들에게서 먹을 것이나 그밖의 필요한 물품들을 강탈한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것 역시 사회가 통합되지 못하고 불안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과거의 행적으로 큰소리를 칠 수 있는 것은 현재가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고, 미래 역시 불안정하고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부유한 농민들을 쫓아내는 장면에서 농민들에 대한 정권의 태도, 그 과정에서 속절없이 죽어나가는 많은 동물들의 모습은 혁명이 순탄치 않음을, 하여 구덩이를 파던 노동자들이 집단 농장의 일에 관여하게 되고, 자신들이 원래 하려던 일에서 멀어지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결국 나스탸가 죽고, 치클린은 나스탸를 묻을 구덩이를 파면서 소설이 끝나는데... 혁명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혁명 속에서 사색에 잠기던 보셰프는 생각을 많이 한다고 일터에서 쫓겨나고, 혁명 전에 부유했던 농민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추방당해야 한다. 지식인 역시 마찬가지다. 당의 방침에 맞지 않으면 언제든 숙청된다. 


그것은 집단 농장의 활동가가 당의 명령서 한 장으로 그 자리에 쫓겨나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니 자율성을 가지고 또 그 상황에 맞게 일을 하기는 힘들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혁명이 추구했던 미래 세대를 위한 사회 건설이 이루어질까?


이미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고 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신념이 있고 자신의 신념대로 일을 추진하던 치클린이 나중에 나스탸를 묻을 구덩이를 파면서 소설이 끝나는데, 이렇게 나스탸의 죽음이 그 결과를 알려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소설은 주도하는 자의 관점이 아니라 수행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풀어가고 있기에 혁명이 일어난 뒤 진행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일들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묘사를 통해서 러시아 혁명 이후 러시아 농민과 노동자에게 닥친 현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서 과연 혁명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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