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동규 시인의 시집을 읽다. 노년의 냄새가 풀풀 나는 시집이다. 이제는 죽음에 더 가까이 간 시인의 시들.


  그래서 이 시집에는 '맨땅'이라고 낮은 곳이 나오는가 하면 자신의 삶이 '조그만 포구'가 되었다고 읊조리는 시들이 있다.


  나이듦. 늙음. 무엇을 해야 할 때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시. 읽다가 이 시를 보면서 그래, 어쩌면 이것이 늙음이 삶을 지탱하는 방법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한창 때를 지나 이젠 꺾인 때. 그럼에도 자신이 꺾이기 전의 모습대로 살아가겠다고 아등바등 대는 것이 아니라, 꺾인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꺾인 대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태도. 그런 삶.


그것은 죽음이 삶을 지탱하는 방식이기도 하고, 늙음이 젊음을 지탱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그러한 삶의 모습들. 젊음은 그 자체로 존재한다고 하겠지만, 아니다. 늙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젊음이 젊음이다.


말이 필요없다. 시인의 이 시를 읽으면서 늙음이 삶을 지탱하는 모습을 생각해 본다.


  허리 꺾이고도


장맛비 갠 오후 짧은 산책 나갔다가

길가의 풀꽃 하나에 마음 빼앗긴 적이 있었다.

안과에 계속 다녀도 눈이 편치 않아

마음이 어디에고 자리 잡기 힘들어할 때

마을버스 종점 지나 서달산 가는 길에

뜻하지 않게 만난 씀바귀.

공사판에서 날라온 흙 조각에 맞았나

꽃대 가운데가 꺾이고도

땅으로 떨어지는 금빛 얼굴을 쳐들고 있었어.

흠집 하나가 얼굴 가운데 씨앗처럼 붙어 있었지.

자세히 보니 조그만 풍뎅이,

손 내밀어 날려버릴까 하다 그냥 놔뒀어.

그래, 벌 나비는 아니더라도

산 것에게 황금빛 쉴 자리 하나 마련해주는 게

허리 꺾이고도 얼굴 쳐든

한 꽃의 완성이 아니겠나.


황동규, 오늘 하루만이라도. 문학과지성사. 2020년 초판 3쇄. 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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