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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고 싶은 아이 - 2021 아르코 문학나눔 선정 ㅣ 죽이고 싶은 아이 (무선) 1
이꽃님 지음 / 우리학교 / 2021년 6월
평점 :
학교를 배경으로 한다. 두 친구. 남들이 보기에 친해 보이기도 하고, 한 친구가 다른 친구를 이용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
남들의 눈에 비친 이 아이들의 모습 중에 어떤 것이 진실일까? 과연 둘 사이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을까?
친구란 우정을 나누는 사이라고 한다면, 친구라는 말에는 이익이라는 말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이는 관계, 그런 관계를 맺고 지내는 사이를 친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친구 사이에서는 친해 보인다는 말도, 이용한다는 말도 성립하지 않는다.
그냥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두 친구 사이를 사람들이 다르게 평가하는 데에는 무언가 이유가 있을테다. 그 이유를 찾아가는데 이 소설의 핵심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를 '위악과 위선'이라는 말로 정리하고 싶어졌다. 주연이는 위악, 서은이는 위선. 그렇게 딱 나눌 수는 없지만, 대체로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다. 아니, 소설 속 서은이는 위선이 아니라 선함을 지닌 아이다.
그런데 그런 선함이 가장을 통해 나타나는 경우가 바로 주연이와의 관계에서다. 선함. 능력 없는 선함은 남들에게 인정받지 못한다. 남에게 이용당할 수 있다.
"넌 착하니까 ...:란 말 속에서 그런 힘없는 착한 사람을 이용하려는 태도가 숨어 있다. 하지만 이런 착함을 남에게 보여줄 때도 있다. 무언가 자신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있을 때 착함으로 무장할 수도 있는 것. 이것을 '위선'이라고 해도 좋다.
서은이는 착하다. 본성이 착하다. 가난한 집에서 살지만 부모를 원망하지 않는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도 않는다. 남에게 군림해 본 적도 없다. 그렇게 착한 아이를 대부분의 영악한 아이들은 무시한다. 대놓고 따돌릴 수도 은근히 따돌릴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것에 대해 대응을 하지도 않는다.
이때 서은이에게 다가온 주연. 집이 부유하고, 무엇 하나 부러울 것이 없는 주연이는 서은이의 친구가 되어 준다. 자신에게 맞지 않는 운동화나 옷도 준다. 그러나 이 아이는 자신의 마음을 주는 법을 잃었다.
기대에 찬 부모, 자신들의 결핍을 딸에게서 충족하려고만 한 부모 밑에서 자란 주연은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지를 잘 모른다. 늘 받고만 살았기 때문에 받는 데에 익숙해져 있기에,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일에 악으로 대응한다. 속으로는 한없이 약한데, 그 약함을 감추기 위해서 '악'을 가장한다. '위악'이다.
그러니 주연은 서은이에게 자신의 온 마음을 주면서도 그것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마치 군림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군림하는 것처럼 행동한다고 했지만, 사실 그것은 군림이다. 자신의 뜻대로 서은이를 움직이게 하는 것.
이것은 주연이 생각하기에 '위악'이지만, 서은에게는 '악'이다. 견딜 수 없는 행위이다. 지금은 없어서 참고 있지만, 언젠가는 참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하는. 자신의 행동이 자신의 마음을 감춘 '위악'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면 좋았으련만, 주연은 그것이 '위악'인지 알지 못하고 좋은 행동, 친구를 위한 행동이라고 착각을 한다.
왜? 서은이가 마치 그것을 진심인양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였으니까. 주연이 앞에서 서은이는 '위선'이었으니까. 진실을 감추고, 지금 필요한 것들을 얻을 수 있는 관계. 그것을 지탱해주는 것은 바로 주연이의 비위를 맞춰주는 것. '위선'이 필요하다.
자, 어떤 사람이 더 약한가? '위악'은 약한 자신의 내면을 감추기 위해서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다. '위선'은 자신의 착하지 않음을 감추기 위해서 겉으로 꾸며내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내면의 강함은 '위악'보다는 '위선'에서 발견할 수 있다.
집안의 경제 형편과는 다르게 내면은 서은이 훨씬 강하다. 단지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 겉으로는 강한 것 같은 주연은 내면의 약함을 보여주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위악'으로 나타날 수밖에.
이 둘을 둘러싼 다른 인물들은 바로 이 '위악과 위선'을 판단하려 한다. 아니 그들은 '위악과 위선'을 판단할 수가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악과 선'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소설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주변인들에게 보인 모습이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그리고 '악과 선, 위악과 위선'을 우리가 명확히 구분할 수 없음을.
무엇보다 친구라는 관계에서는 이러한 '위악과 위선'이 작동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생각하게 한다. 친구란 그렇게 꾸며 보이는 관계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신들을 드러내고, 그것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학교라는 공간에서 과연 '친구'가 있는지를 묻게 한다. 두 아이를 둘러싼 다른 아이들을 봐도 그렇고... 두 아이의 관계도 그렇다. 이는 두 아이의 관계를 통해서 학교 교육이 놓치고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도 생각하게 한다.
우정을 키우는 장으로서의 학교. 옛말이다. 지금은 '위악과 위선'이 판치는 관계들만 있는 학교가 아닌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2권이 나왔던데,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