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대해 생각한다. 온전한 사랑을 받은 사람은 사랑을 줄 줄 아는 사람이 된다고 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낀 사람은 사랑을 잃지 않는다. 미움보다 증오보다 사랑을 간직하고 그렇게 살아가려 한다.
미움과 증오가 넘치는 세상에서 '사랑'만큼 소중한 가치는 없다. 세상에 나온 성인들이 모두 '사랑'을 외치지 않았던가. 그 '사랑'이란 이름이 다르게 쓰이기는 했지만 모두가 '사랑'임은 분명하다.
'사랑'을 좋음, 착함 등으로 바꿔도 좋다. '사랑'은 그런 가치들을 포함하고 있으니까.
이 시집에는 그대도 나오고, 사랑도 나오고, 또 자연도 나오고, 사람들의 삶도 나온다. 분노보다는, 미음보다는 사랑이 더 많이 나온다. 그렇게 사랑은 한 사람을 넘어서 다른 사람들에게로 흘러넘치게 된다.
박두규 시인의 시집 [두텁나루 숲, 그대]를 읽으면서 그런 사랑을 생각했다. 물론 '사랑'이란 제목을 지니고 있는 아주 짧은 시도 있다.
사랑
단 한 번의 기억으로 한 생(生)을 버티게 하는 것.
박두규, 두텁나루 숲, 그대, 문학들. 2013년 초판 2쇄. 28쪽.
이 '사랑'을 무슨 성인들이나 베풀 수 있는 행위로 인식하지는 말자. 우리는 모두 우리 삶에서 이런 '사랑'을 베풀고 또 받기도 하니까. 그런 사랑이 우리의 삶을 버티게 하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온전한 '사랑'을 받은 적이 있음을 기억한다면... 아니 그렇게 누군가에게 온전한 사랑을 주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고만 있더라도.
이 시집에 실린 시 중에 '호모 엠파티쿠스'(84쪽)라는 시도 그렇다. 이것이 '사랑'이 아니고 무엇인가. '공감'이란 바로 사랑의 다른 이름이 아닌가.
누군가의 어려움을 알고 함께 하려는 마음. 그것이 공감이고 사랑이다. 성인(聖人)들은 더 '큰사랑(솔직히 사랑에는 큰사랑, 작은사랑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 모두에 대한 사랑일 수 있음을 생각하니까... 여기서 이기적인이라는 의미가 담긴 사랑은 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을 베풀었다고 하지만, 사람들은 살면서 이렇게라도 사랑으로 살아가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척'하는 것은 어떨까? '척'한다는 것은 무엇이 옳은지를 안다는 말 아닌가. 자신의 마음은 그렇지 않더라도 '척'한다는 것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그렇게 말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척'을 한다.
하지만 이렇게 '척'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뻔뻔하게 너무도 뻔뻔하게 다른 사람들을 폄훼하고, 괴롭히면서도, 자신의 잘못이 뻔히 보이는 데도, 나는 아무 잘못도 없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다.
'척'조차 하지 못하는, 않는 사람. 이들이 과연 '사랑'을 받은 적이, '사랑'을 한 적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들에게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감각이 없나 보다. 그냥 자신에게 좋은 것이면 다 '사랑'이라고,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그리고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사랑'이라고 여기나 보다.
그러니 '척'할 필요조차 없지. 그냥 그렇게 '사랑'이 뭔지 모르니 '척'할 수도 없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안쓰러워 하는 모습이 안타깝기도 하다.
박두규 시인의 시 중에 '척'이라는 시가 있다. 지금 우리 눈에 자주 띄는 유명한 사람들, 제발 '척'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 적어도 무엇이 옳은지, 좋은지는 알고 있다는 뜻이니까.
척
말죽거리 시장에서 골라, 골라 외치며
왼쪽 다리를 떠는 장사꾼인 척
자신의 등에 비수를 꽂은 원수의 손을 잡는 성자인 척
사형수가 되어 감옥에서 깨알 같은 사랑의 편지를 쓰는 지아비인 척
남북국 시대의 역사를 새롭게 쓴 영웅인 척
건국 이후 멈추었던 민주주의를 재가동한 투사인 척
동인 서인의 당쟁에 쓸려 다니며 외줄을 타는 정치구단인 척
세상의 진실을 좇아 양심에 의해 행동하는 지성인인 척
그렇게 척하며 산다고 미워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사실은 그가 죽은 뒤에도 죽은 척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죽은 척이 죽음을 흉내 내는 것처럼
행동하는 양심인 척하는 것은
그 양심을 가지고 싶어 안달이 났다는 것이다
이것저것 하고 싶어 안달이 났는데
대통령 되면 이거 다 한 번에 해결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대통령 병 환자가 될 만도 하다
하지만 명환자가 있어서 명의사가 나오는 것처럼
그를 척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그는 이미 척에 이른 사람이다
문제는 이르지 못한 자들의 이르지 못한 말들이다
하지 않으려는 자는 할 수 없는 자의 초상이고
척에 이른 자는 그것을 간절히 원하고 행하는 자일 뿐이다.
꽃은 향기로 비우고 나비는 춤으로 비울 뿐이다.
박두규, 두텁나루 숲, 그대, 문학들. 2013년 초판 2쇄. 94-9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