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견자들
김초엽 지음 / 퍼블리온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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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디스토피아다. 지구의 지상에서 살아갈 수 없게 된 인간. 외계에서 온 범람체들에 의해 지상을 빼앗기고 지하로 스며들어 살아가는 인간 세계가 나온다. 범람체들은 거의 무한증식이다. 자신들과 접촉한 대상에 들어가 그 대상을 지배한다.


그렇게 여겨지는 범람체들과 공생할 수 없는 인간들은 그들을 피해 지하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상을 찾으려는 노력을 한다. 지상을 찾기 위해서 지상을 탐색할 파견자들을 내보낸다. 파견자들은 지상을 탐색하고 범람체들을 없애는 방법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지하에서도 계속해서 범람체들에 의해 감염되는 사람들이 나온다. 이들은 인간들과 함께 살 수 없다. 광증이라고 표현한다. 미친 사람. 그런 사람은 격리되어야 한다. 그들은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격리시설로 옮겨진다. 그 격리시설을 가족들조차도 방문하지 못하지만.


지상은 범람체들에 의해 잠식당했고, 지하에서도 범람체들에 감염되는 사람이 속속 나오는 상황에서 인간들은 범람체를 없앨 연구를 한다. 지상을 되찾으려 한다.


파견자들은 그러한 막중한 임무를 띤 사람들이다. 그런 파견자가 되고 싶은 태린이 있다. 이제프를 사랑하는, 그래서 이제프와 함께 지상을 거닐고 싶은.


파견자 시험을 보는 와중에 태린은 자신의 머리 속에서 다른 존재를 감지하게 된다. 그 존재와 대화를 하게 되기도 한다. 의존하기도 하지만 시험 마지막에 자신이 이름 붙인 '쏠'이라는 존재에 휘둘려 폭주하고 만다. 대형사고를 친 것이다.


태린에 대한 징계는 이제프의 도움으로 추방이 아니라 파견이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아주 위험한 임무를 띠고 두 명의 파견자들과 함께 파견되는 태린. 여기서 태린은 다른 세계를 인식한다. 자신의 머리 속에 있는 존재의 정체도 깨닫게 된다.


지상과 지하, 범람체들과 인간, 그 사이에 있는 범람화된 인간들. 그렇다. 이제 지구에는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존재들이 탄생하기 시작했다. 그들을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 이는 공생이냐 파괴냐의 갈림길에 서게 한다.


공생의 조건. 서로 다른 존재임을 인정하면서 자신을 지키면서 자신을 내어줄 수 있어야 한다. 즉 범람체들도 인간을 완전히 잠식해서는 안 되고, 인간 역시 범람체들을 인정하지 않아서는 안 되고 지구에서 영원히 몰아내려 해서도 안 된다.


이 사이에 범람화된 인간이 있다. 범람화된 인간 중에서도 태린과 같이 범람체와 공생하는, 두 자아가 동시에 한 몸에 존재하는 존재들도 있다. 바로 태린과 선오가 그런 인물들이다.


인류는 어떤 선택을 해야할까? 소설은 범람체로 인해 지하로 쫓겨난 인간들의 세계인 디스토피아에서 시작한다. 그렇다. 인간은 자신들이 살던 터전에서 쫓겨났다고 여긴다. 그들은 지상을 다시 찾아야만 한다고 한다.


그 과정은 범람체와 인간의 전쟁일 수밖에 없다. 이런 전쟁을 막으려는 존재들이 나온다. 변화를 인정하고, 다름을 받아들이면서 함께 살아가자고 하는 존재들. 범람체들 역시 인간을 이해하는 과정을 거치고, 인간들 역시 범람체들을 이해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접촉이 있어야 한다. 접촉 없는 이해는 없다. 이런 접촉을 이끄는 존재가 바로 태인이다. 선호다. 이들은 지상에서 오는 신호를 감지하고 이를 이해하려 한다. 그런 과정에서 범람체들과 또 범람화된 인간들을 만나게 된다.


만남에서 오는 이해, 특히 쏠과 공생하면서 다른 존재를 받아들인 태린. 이들은 전쟁이 아닌 공생을 택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이제프를 희생시키면서도...


집단과 개인의 공생. 집단 속에 개인이 완전히 녹아들지도 않고 또 개인을 위해 집단을 없애지도 않은 함께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과정이 소설에서 펼쳐진다.


범람회된 인간들은 인간이 아닌 것이 아니라 변한 인간, 즉 다른 형태의 인간일 뿐이라는 인식으로 가는 지난한 과정. 세 존재들이 경계를 정하고, 또 서로 경계를 허물면서 살아가게 되는 과정을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디스토피아에서 유토피아로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유토피아는 단일성에서 오지 않음을, 유토피아는 다양함에서, 다양함을 인정하는 관계 속에서 만들어짐을 생각하게 한다.


중간지대의 확장이 유토피아로 가는 길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는 태린이 경계지역에서 범람체들과 인간들을 연결짓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에 인간들의 인식이 범람화된 인간들도 인간이라고 바뀌어 간다. 


'그들은 우리를 움직이는 징그러운 시체라고 생각해. 그래서 그냥 땅속에 파묻어버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이왕 파묻을 거면 무기로 써먹고 묻겠다는 거지. 하지만 우리는 죽은 게 아니야.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게 됐다. 그걸 원하지 않았다고 해도.' (363쪽)


범람회된 인간, 즉 전이자들은 이런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러다 경계지역이 생기고 점차 서로 접촉하면서 사람들의 생각은 변한다. 바로 이렇게.


'경계 지역에서 새롭게 살아가는 전이자들의 삶을 목격하자, 도시 사람들의 생각도 바뀌었다. 그것도 삶이라는 것. 단지 다른 방식의 삶일 뿐이라는 것을 직접 보았으니까.' (418쪽)

 

그렇다고 한번에 확 변하지 않는다. 유토피아는 결과가 아니다. 과정이다. 디스토피아가 결과라면 변해가는 과정, 서로가 서로를 이해해 가는 과정이 바로 유토피아다. 


'앞으로도 그 균형이 지금처럼 유지되리라는 법은 없었다. ... 태린은 경계 지역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그 답을 찾아내주기를 바랐지만, 어쩌면 아이들도 명확한 답에는 다다르지 못할지도 모른다. 단지 불균형과 불완전함이 삶의 원리임을 받아들이는 것, 그럼에도 끊임없이 움직이며 변화하는 것,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것만이 가능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419쪽)


이렇게 소설은 태린이 점차 각성해가면서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잇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이는 디스토피아에서 유토피아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결코 쉽지 않은, 어쩌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존재를 잃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나아가야 하는 길일 수도 있다.


그렇게 김초엽은 다른 생명체에 잠식당하는 지구의 모습을 그리면서 그것이 정복이 아니라 공생으로 갈 수 있음을, 우리가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야 함을 소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결코 쉽지 않겠지만.


이를 현실에 반영하면 사람들의 이주를 생각하면 된다. 이주민들을 자신들의 삶을 위협하는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새로운 삶을 만들어가야 함을. 그들과 소통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고민해 봐야 함을. 이주민이 우리 사회에 많이 유입되고 있는 이때, 그들과 어떻게 지내야 할지를 범람체, 인간, 그리고 전이자들의 관계로 치환해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결코 상상 속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현실의 이야기가 소설 속에서 펼쳐진다는 생각이 든다. SF소설은 공상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현실을 반영하는, 우리에게 이 현실에서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SF소설은 공상이 아니라 상상임을, 이렇게 다른 관계로 치환해서 생각해 볼 수 있음을, 이 소설이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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