쿼런틴 워프 시리즈 4
그렉 이건 지음, 김상훈 옮김 / 허블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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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소설.


그 중에서도 과학적 지식이 많이 필요한 소설. 그냥 재미로 읽어도 되지만 과학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흥미를 가지고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양자역학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무어라 이 소설의 개연성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인간이 수많은 경험들을 기억하고 조직하면서 자신의 삶을 꾸려간다는 점을 생각하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단일한 존재일 수가 없다는 점만은 명백하다.


이 소설에서는 수축과 확산이 나온다. 수축은 우리가 지금 생생하게 경험하고 있는 실존으로서의 인간이라면 확산은 자신을 널리 분산시키는 가상의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에서 영화 [매트릭스]가 생각났는데, 수축은 실제 인간, 즉 가상 세계에 접속하지 않은 살아 있는 인간이라고 한다면, 확산은 가상 세계에 접속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므로 확산된 상태에서 인간은 어느 곳에든 갈 수가 있는데, 그런 확산 상태가 수축이 되면 실제 인간으로 돌아오게 된다. 다만, 수축이 될 때 누가 실제 인간이냐는 문제는 남는다. 즉 확산된 존재인 '나'는 수많은'나들'이기 때문이다.


이 '나들' 중에 살아남은 '나'가 수축된 나이고, 이런 나가 살아 있는 존재인 인간을 구성하게 된다. 그렇다면 확산은 어떤 의미일까? 자신을 수없이 확산시킨다는 것은 다른 존재들을 수축시킨다는 의미가 될까?


함께 확산할 수는 없는 것일까? 지구를 둘러싼 버블이 우주로부터 지구를 가려버렸다. 제목이 '쿼런틴(Quarantine)'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구는 격리되었다. 왜? 인간들이 지나치게 확산해서 우주의 생명체들을 죽이기 때문이다.


또 이런 인간들은 수많은 인간들을 죽이기도 한다. 수축된 인간, 자각이 돌아온, 지금 살아 있다고 느끼는 인간은 많은 확산된 인간들의 죽음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소설 속 인물을 통해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일, 우리였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학살하는 일인 것이다.' (343쪽)


이 말을 이해하기가 힘든데, 다른 면으로 생각해보면 나를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나들' 중에 지금의 나를 구성하는 '나'를 제외하고 많은 부분들이 잊혀지거나 사라져버리게 되니, 이를 죽음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그래서 과연 인간의 몸에는 얼마나 많은 세포가 있을까 궁금했다. 하나의 세포가 바로 '나'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런 세포들이 모여 '나'를 구성하고 있으니... 또한 우리 몸에서 수많은 세포들이 죽어가고 새로 태어나고 하니, 이 소설에서 아주 빠른 시간 동안에도 많은 '나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말을 우리 몸 세포들이 죽어가는 과정으로 바꿔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또한 수축된 인간들은 자신들이 지금까지 경험해 왔던 일들 중에서 많은 부분들을 지워버린 현재의 나라는 생각. 현재의 나는 미래를 알 수가 없고, 현재도 알 수가 없다. 현재는 경험하고 그것을 인지하고 기억하는 순간 과거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축된 인간은 현재의 인간이고, 우리는 우리가 살아온 동안 많은 부분들을 묻어버리게 되니, 이는 다른 죽음을 바탕으로 지금의 나가 존재한다고 보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왜 버블이 필요할까? 인간을 격리하는 버블을 왜 설정했을까? 인간의 확산이 다른 생명의 죽음을 불러온다면, 그것을 막아야 하지 않을까? 이 버블을 누가 설치했을까?


소설은 버블이 설치된 다음에 일어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파견된 닉의 관점으로 진행이 된다. 닉이 사건을 해결하려 하는 과정에서 수축과 확산이라는 개념을 알게 되고, 버블을 누가, 왜 설치했는지를 파악하게 된다.


버블이 인류에게 필요할까? 소설은 버블이 필요하다는 쪽으로 해석이 되는데, 그것은 인류의 무한정한 확산이 다른 생명체뿐만 아니라 인류에게도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당한 격리는 필요하다. 이때 격리를 가둬둠으로 해석하지 말고 적당한 거리 둠으로 해석하면 어떨까 한다.


인류의 발걸음이 닿는 곳에 사라지는 생명들도 있음을, 그렇다고 무조건 격리 상태로 살아갈 수는 없다. 인류도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고, 살아간다는 것은 다른 생명들의 죽음을 전제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자신들의 영역을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거리, 그것이 바로 이 소설에서 말하는 '쿼런틴(버블로 상징되는)'이 아닐까 한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하게 읽었고, 이렇게 양자역학이나 또다른 과학 지식에 무지해서 이 소설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 읽기를 멈추려는 생각도 했는데, 소설을 그냥 소설로 읽자고 생각하고 읽어나가니, 후반부로 갈수록 흥미로워졌다.


'나'라는 존재는 '수많은 나들'이 중첩되어 존재한다는 생각, 우주는 단일하지 않겠다는 생각도 하면서, 그리고 영화 [매트릭스]도 생각하면서, 또 엉뚱하게도 [장자]의 '호업몽(胡蝶夢)'도 생각하면서, 그래서 결말이 뭔데? 하면서 읽었다.


아마도 이 소설을 곱씹으면서 읽으면 더 많은 것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냥 이렇게 많은 '나들'이 지금의 '나'라는 사실, 이런 '나'가 존재하기 위해서 많은 '나들'이 사라져야 했음만을 생각한다.


그리고 더 많은 '나들'이 계속 존재한다면, 그것은 혼란에 불과할 뿐이라고, 적당한 수축, 즉 격리가 있어야 한다고, '나'를 많은 '나들'로부터 수축해서 격리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그렇다고 많은 '나들'을 다 없애라는 것은 아니다. 이 '나들'이 '나' 속에 융합되어 지금의 나를 만들고 있으니...


다만 지나친 확장은 나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다른 생명체에게도 좋지 않음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덧글


소설을 읽으면서 '아바타'도 생각났고, 홀로그램도, 또 서유기의 손오공도 생각이 났으니,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공간에 얼마나 많은 '나들'이 있을까, 이 공간과 시간은 유일무이한 존재인가? 아니면 공간과 시간이 다양하게 이곳에 중첩되어 있는가 등등... 복잡한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모르겠으니, 어쩌겠는가 그냥 소설로 읽을 수밖에.


궁금해서 인간의 몸에 세포가 몇 개나 있을까 찾아봤더니, 인터넷의 특성에 걸맞게 많은 수들이 나열되어 있는데, 그 차이가 너무 심하다. 30조에서 60조까지 벌어지니... 실체로 존재하는 인간의 세포 수마저도 잘 모르니, 인간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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