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씨 451 환상문학전집 12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박상준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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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1 분서갱유(焚書坑儒)


학창시절, 중국 역사를 배울 때 분서갱유에 대해서 배운다. 책을 불태우고, 유학자들을 묻었다고. 이는 지식의 탄압이다. 결코 성공하지 못한. 이 분서갱유는 아무리 탄압을 해도 지식을, 교양을, 학문을 막을 수는 없다는 역사적 증거로 언급이 된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조차도 자신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 다른 생각을 전달하는 사람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분서갱유는 하나의 사건으로 기록되고, 후대 사람들에게 학문을 탄압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남겨준다.


사상의 다양성. 제자백가(諸子百家)라고 또 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고 각자의 사상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임을, 분서갱유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분서갱유를 서양에서 실천한 인간이 있었으니, 바로 히틀러. 그 역시 나치에 반대하는 책들과 예술작품만이 아니라, 순수한 예술작품들도 불태워버렸다. 나치는 바로 사람들이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해야했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나치가 성공했는가?


역사는 되풀이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실패한 역사는 반복된다. 역사에서 배운 것이 없는 사람들은 같은 실패를 반복할 뿐이다.


진시황과 히틀러의 실패. 이는 사상의 자유는 억압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다. 꼭 책만이 아니다. 말을 막는 사회 역시 성공할 수 없다. '입틀막'이라는 말이 나오는 사회에서 다른 사람의 입을 막으려는 사람들은 예전 역사를 다시 찾아보아야 한다. 자신들의 미래가 어떠할지를.



장면2  학년말 학교 풍경과 수능 국어 시험


학년말 시험이 끝나면 또 수능이 끝나면 많은 학교에서 비슷한 장면이 연출된다. 학교 운동장에 트럭이 오고, 그 트럭을 향해 학생들이 교과서를 들고 나른다. 들고 나른다는 표현보다는 트럭에 교과서를 내던진다.


폐휴지로 팔려가는 교과서들. 더이상 볼 일이 없다는 듯이 학년말에 교과서들은 트럭으로 직행한다. 현대판 분서갱유라고 할 수 있을까?


교과서의 용도는 시험이나 입시에만 해당하는 걸까? 그런 교과서를 금과옥조처럼 여기면서 학생들은 달달 외운다. 교과서가 없으면 교사에게 지적을 당하거나 점수를 깎이기도 한다.


진리추구를 하는 책이 아니라 점수추구를 하는 책이다. 수많은 사상들이 실려 있는, 다양한 생각을 만나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갖추게 하는 책이 아니라 점수를 위하여, 대학을 위하여 하나의 정답만을 좇게 하는 책이다.


다양성은 없고 오직 단 하나의 정답만이 있는 책. 그런 책은 시험이 끝나면 더이상 필요가 없다. 현대판 분서는 점수와 관련이 있다. 자발적인 분서다. 태우지는 않으니 분서(焚書)가 아니라 갱서(坑書)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이런 교과서 버리기는 책의 쓸모를 없애는 역할을 한다. 책은 시험과만 관련이 있을 뿐 - 고전이라 불리는 많은 문학 작품, 철학 책 등등이 시험을 위해서 요약되거나, 문제풀이용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책을 태울 필요가 없다. 책에 대한 환멸을 자연스레 심어주면 책은 사람들에게서 멀어진다 -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지 않는다. 귀찮은 존재다.


이런 관점, 태도를 교과서가 심어준다. 마찬가지로 수능에서 국어 시험이 그렇다. 오로지 점수를 올리기 위한 글읽기다.


문학 작품, 실려 있어서 삶의 다양성을 체득하는 읽기로 나아가지 않는다. 문제풀이, 오로지 정답은 하나, 인물의 행동이나 작가의 생각은 하나여야 한다. 다른 관점에서 파악하면 안 된다. 그러면 틀린 답이 된다. 다른 답이 아니라.


이마저도 수능 국어 시험에서는 문학 작품을 많이 다루지 않는다. 비문학이라고 해서 문학이 아닌 다른 글들이 지문으로 채택이 된다. 아예 다양한 관점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게, 그 글에서는 정답이 단 하나밖에 없다고, 그렇게 가르치고 배운다. 그나마 다양한 삶이 표현되어 있는 문학은 수능 국어에서도 찬밥이다. 다양성은 시험과는 상극이다.


굳이 분서갱유를 할 필요도 없다. 학교 교육을 착실히 받고, 대학에 진학을 하려고 열심히 공부한 결과 책과는 자연스럽게 멀어진다. 브래드버리의 [화씨 451]에 나오는 방화수처럼 책을 불태울 필요가 없다.



장면 3  브레드버리의 [화씨 451]


책을 불태우는 사회, 불태우는 직업이 있다는 얘기는 책의 효용성을, 책이 삶과 관련이 있음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증거다. 책을 무시하는, 책의 존재 자체가 귀찮아진 세상에서는 책을 불태우는 일을 할 필요가 없다.


[화씨 451]에서는 책을 보존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억압하면 할수록 그들은 책을 암기한다. 자신들이 책이 된다. 소설에서는 책 사람들이라고 나온다. 


"사악한 정치 소설인 [걸리버 여행기]를 쓴 조나단 스위프트를 소개합니다. 이 사람은 찰스 다윈이고, 이 사람은 쇼펜하우어이고, 이 사람은 아인슈타인, 그리고 여기 바로 이 사람은 아주 관대한 철학자인 앨버트 슈바이처입니다. 몬태그, 여기 있는 우리 전부가 아리스토파네스, 마하트마 간디, 석가모니, 공자, 토마스 러브 피콕, 토마스 제퍼슨, 링컨입니다. 그리고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임이기도 하고." (232쪽)


아무리 책을 불태워도 이런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책을 보존하려는 사명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종이책을 보존하면 발각이 될 염려가 있다. 그러니 이를 통째로 외울 수밖에. 사람들이 각자 책이 된다.


그리고 그 책들이 다음 세대들에게 책을 전수해준다. 문자가 아닌 음성으로. 물론 사라지는 책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종이책으로 보관하고 있다가 방화수들에게 모두 불태워지면 그보다 더한 피해는 있을 수 없으니...


"... 우리 아이들에게 입으로 책을 전해 기다리게 하고, 또 그 아이들이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물론 그런 과정에서 잃는 것도 많겠지. 하지만 사람들이 강제로 듣게 만들 순 없소. 자신들이 필요할 때 와야 하오.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고, 왜 세상이 날아가 버렸는지 궁금해하면서, 결코 오래 걸리진 않소." (233쪽)


몬태그라는 방화수가 책을 보존하는 사람으로 변해가는 과정,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일들을 그린 소설이 바로 [화씨 451]이다. 화씨 451도는 책이 불타 없어지는 온도라고 하는데 (과학적으로 맞는지 안 맞는지를 따지지는 말자고 한다. 당시 작가는 소방서에 문의해서 그런 온도로 제목을 정했다고 하는데, 온도의 정확성이 여기서는 중요하지 않다) 불태워지는 종이책들과 그 책들의 내용을 보존하려는 사람들이 소설에 등장한다.


소설을 읽으면서 과연 책을 불태우는 사회가 소설 속에만 존재할까 하는 의문을 품는다. 닫힌 사회에 대한 은유가 아니라,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지속되어온 현실이 아닐까. 지금은 이렇게 대놓고 책을 불태울 수는 없다.


하지만 소설 속 집 벽면을 차지하고 사람들을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텔레비전처럼, 이미 너무도 많은 기기들이 우리를 책에서 멀어지게 하고 있다. 자연스레 우리는 생활에서 책을 불태우고 있다.


학교에서 교육을 통해서, 학교를 떠나서는 다른 최첨단 기기들을 통해서 책을 만나지 않게 한다. 굳이 소설에서처럼 방화수를 등장시켜 책을 불태울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책을 소중히 여기고 책과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로 인해서 책은 인류의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소설에서 아무리 책을 불태우고 탄압을 해도 책 사람들처럼 책과 함께 하는 존재들이 있듯이.


이 소설을 다른 방면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소설에 나오는 방화수들과 같은 역할을 하는 존재는 무엇인가? 또 소설에서 텔레비전이 하는 역할을 하는 존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과연 이 시대는 책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가?


1950년대에 나온 소설인데, 지금도 유효하다는 점에서 놀랍다. 놀라운 소설이다. 디지털 디지털, 입틀막 입틀막 하는 시대에 이 소설은 여전히 우리에게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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