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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여름을 이 하루에 ㅣ 레이 브래드버리 소설집 2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이주혜 옮김 / 아작 / 2017년 9월
평점 :
레이 브래드버리의 소설을 읽었다. 몇 권 읽으면서 이 작가도 대단하구나 했고, 특히 그가 주요 배경으로 삼고 있는 화성이 최근에 인류가 이주할 행성으로 다시 각광을 받고 있어서 더욱 흥미가 가는 작가다.
이 작품집은 그의 소설들을 두 권으로 나누어 번역 출간한 책 중 두 번째 책이다. 이 소설집에 실린 작품 중 가장 길다고 할 수 있는 '지구에 마지막으로 남은 시체'는 지구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시대는 먼 미래고, 이때 지구의 풍습을 잘 이해 못하는 사람에게는 '화성에서 갓 돌아왔느냐'는 질문을 한다. 지구와는 다른 세상으로 화성을 설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지구인이 이주해서 지구의 풍습을 가장 오랫동안 지니고 있는 화성으로 레이 브래드버리는 화성을 선택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화성의 모습은 다른 작품에서는 다르게 펼쳐진다. 이상하게도 이 작품집에서 화성인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구인이 화성에 도착하고 나서 화성인으로 변해간다. '백만 년 동안의 소풍'의 결말은 지구인이 여행을 떠났는데 이들이 화성인이 되어버린 모습으로 끝나고 있으며, '검은 얼굴, 금빛 눈동자'라는 작품 역시 지구의 재난을 피해 이주한 사람들이 화성에서 화성인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이런 작품들을 읽으면 브래드버리가 당시 지구의 모습에 많이 실망하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아래 작품을 보자. '백만 년 동안의 소풍'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지구의 논리와 상식, 훌륭한 정부, 평화, 책임감을 찾고 있지"
"지구에는 그런 것들이 다 있었어요?"
"아니. 지구에서는 못 찾았단다. 이제 지구에는 그런 것들이 아예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나타나지 않을 거다. 어쩌면 예전에 있었다는 것도 그저 우리가 속아서 그렇게 믿었던 걸지도 모르지." ('백만 년 동안의 소풍'에서. 210쪽)
이미 지구에는 논리와 상식, 훌륭한 정부, 평화, 책임감을 찾을 수가 없다. 먼 과거의 용어가 되어버렸고, 그 용어가 한때 존재했던 것들을 표현한 말이었는지, 아니면 그런 것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꾸며낸 이야기인지도 헷갈려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런 지구에서 살 수 없으니 화성이나 다른 행성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다. 논리와 상식, 훌륭한 정부 (이것은 나중에 거론될 문제다. 우선 이주한 사람들은 소수고, 그들은 정부랄 것 없는 아나키즘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상호 협동, 호혜, 평등, 자율 등등을 생활헤서 자연스럽게 실천하는 초기 공동체의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다), 평화, 책임감이 실현되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
하지만 브래드버리는 결과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들이 변했다까지만 서술하고 있다. 그 다음은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 다만, 이 지구에서 그렇게 우리가 밀려나지 않도록 머언 우주의 어느 행성에서 그런 가치들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이 지구에서 실현했으면 하는 바람이 담겨있지 않나 한다.
'그분'이라는 소설을 보면 그렇다. 사랑과 평화를 가져온 그분이 우주의 어느 행성에 나타났다고 한다. 하지만 선장은 믿지 않는다. 그는 그분을 찾아 다시 우주 여행을 떠난다. 그분은 그 행성에 있음에도.
이 소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에서 '그분'과 같은 평화, 사랑, 책임감 등을 실천해야 한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그분'을 찾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와 있는 '그분'과 함께 해야 한다. 그러나 '그분'을 다른 곳에서 찾는 사람 눈에는 '그분'은 보이지 않는다. '그분'은 늘 앞서 떠날 수밖에 없다. 영원히 '그분'을 찾아 헤맬 수밖에 없다.
내가 살고 있는 곳에 사랑과 평화를 정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평화를 찾아 계속 떠나가기만 한다면 결국 내가 살고 있던 곳은 폐허가 될 수밖에 없다.
이 작품집에 실린 많은 소설들에서 지구가 파괴되는 것으로 이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이 파괴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 과기스러운 소설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브래드버리의 이 소설집이 어둡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모든 문명을 파괴하는 시대에도 희망을 잃지 않는 '미소'란 작품을 보아도 그렇다. 아주 작은 그림의 조각을 지니고 있는 소년. 모나리자의 미소를 지니고 있는 소년에게 미소는 '따뜻하고 다정하게'(264쪽) 머무르고 있다.
이는 인류가 초래한 파괴에도 불구하고 인류에게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님을, 그런 새로운 문명을 우리가 건설해야 함을 브래드버리가 말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미소'라는 소설에서 사람들의 말을 통해 브래드버리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맞아. 예쁜 것들을 볼 수 있는 영혼을 가진 자가 나타날 거야. 어느 정도는 우리에게 되돌려줄 거야.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그런 문명 말이지."
"무엇보다 문명에는 전쟁이 있다는 걸 알아둬!"
"하지만 다음 문명은 다를지도 몰라." ('미소' 중에서. 260쪽)
브래드버리가 2012년에 세상을 떴다고 한다. 그때까지 그는 전쟁을 얼마나 겪었을까? 1920년에 태어났으니 1차 세계대전을 제외하고 그 이후에 일어난 많은 전쟁들을 겪었을 테니, 그가 소설에서 인류를 화성으로 이주시키는 장면을 많이 표현한 것도 이해가 간다.
단지 화성의 이주만이 아니라 인류가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꿈꾸었음을 '다음 문명은 다를지도 몰라'라는 말과, 소년이 지닌 미소를 통해서 그것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화성에 정착한 사람들이 지구인의 모습이 아닌 화성인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표현하고, 그런 그들의 모습을 '검은 얼굴, 금빛 눈동자'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화성인들은 대단히 평화적으로 보입니다. ..."(292쪽)
이것이 바로 브래드버리가 꿈꾸던 세상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작품을 읽으면서 이 소설에 나타난 지구의 모습과 지금이 얼마나 비슷한지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논리와 상식, 훌륭한 정부, 평화, 책임감'이 지금 시대에도 남아 있지 않다면 이건 너무나 끔찍한 일이다. 지금까지 겪어왔던 숱한 전쟁과 학살들, 지구가 망가져가는 데도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태도들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면, 그건 이 소설에서 보여주고 있는 결과와 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브래드버리가 이 작품집에서 보여주는 세계의 모습은 변하지 않고 이대로 지구의 생활을 지속했을 때 만나게 되는 미래가 아니겠는가. 그런 미래가 바람직하지 않음은 이 소설집을 읽어보면 알 수 있을 테니... 한번 읽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