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
한정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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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마릴린 먼로일까 생각했다. 뜬금없다는 생각도 들었고. 마릴린 먼로, 섹시 심벌로 유명한 미국 배우 아니던가. 우리나라하고 인연이 있다면 6.25전쟁 때 방문했다는 정도.


소설 속에서 마릴린 먼로는 사진으로 등장한다. 그렇지만 많은 것을 함의한다. 마릴린 먼로를 남성들이 좋아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말을 고분고분 듣고, 자신들의 환상에 맞았을 때만이다. 마릴린 먼로가 주체적으로 행동할 때는 온갖 비난을 쏟아부었다.


그것은 마릴린 먼로는 남성들의 환상 속에서만 존재해야 했기 때문이다. 주체적인 인간이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만 행동해야 하는 사람. 그런 존재가 마릴린 먼로였다. 즉, 남성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사람으로만 존재해야 했다. 결코 자신들과 동등한 인간이어서는 안 되었다.


소설은 이 점을 마릴린 먼로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면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라는 말은 다른 존재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존재로만 있겠다는 말일까? 아니다. 마릴린 먼로를 통해 여성들이 겪는 억압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단지 여성들만이 아니라 다르다는 이유로, 약하다는 이유로 무시당하고 배제당하는 존재들을 드러내고자 이런 제목을 붙였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날 사라진 사람(셜록)으로부터 메시지가 온다. 그 메시지를 풀어나가는 과정이 소설의 서사다. 서술자는 둘. 한 명은 성형외과 의사인 구연정, 또 다른 한 명은 윤설영. 


셜록의 친구인 설영은 셜록이 사라지기 전 8개월 간의 기억이 없다. 분명 충격으로 기억을 잃었을 터. 소설은 이 기억 상실의 공간을 메우는 일로 내용이 전개된다. 그 상실의 부분을 채워주는 존재가 성형외과 의사인 구연정이다.


기억을 찾아가는 과정은 곧 선택과 배제의 과정을 깨달아가는 여정이다. 소설 속에서 선택과 배제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선택과 배제를 누가 하는가?


누가 선택하고 누가 배제하는가? '하다'란 말은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행동을 지칭할 때 쓰는 말이다. 이 말에 해당하는 사람은 힘 있는 사람이다. 위계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다. (사람으로 국한시키면)


그런 사람들은 누구인가? 권력을 쥔 사람, 경제적 부를 축적한 사람, 명예를 획득한 사람. 이렇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이것도 아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 중에서도 다시 위계가 나뉜다. 바로 성별에 의해서.


위계의 피라미드 가장 윗층에는 권력을 쥔 이성애자 남성이 속한다. (나머지 사회,경제적 조건들이 같다고 가정하자) 중간층에는 권력을 쥐지 못하고 권력을 추구하는 이성애자 남성이 속한다. 하층은 또 나뉘는데, 이성애자 여성이 하층의 맨 위를 차지한다. 그 밑에 동성애자를 비롯한 성소수자들이 자리잡는다.


(성별로 나누지 않았을 때의 위계는 여기서 생각하지 말자. 전쟁이 났을 때 또는 위급상황일 때 어떤 존재들이 가장 피해를 입는지 살펴보면 이 위계를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런 위계의 피라미드는 시시때때로 작동한다. '위계에 의한~'이라는 말이 붙은 억압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럼 마릴린 먼로는 어디에 속할까? 하층에 속한다. 남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라고 불리는 배우도 그들의 위계 속에 있을 때만 선망의 대상일 뿐이다. 위계를 벗어나고자 하면 곧장 배제와 탄압이 들어온다.


'선택하다, 배제하다'라는 말의 상대 편에 '선택당하다, 배제당하다'라는 말이 있다. 주체적으로 생동하지 못하고 다른 존재에 의해 행동을 하게끔 당하는 상태. 피동이나 수동이라고 부르는 상태다.


위계의 밑에 있는 사람들은 선택하지 못하고, 배제하지 못하고 선택당하고, 배제당한다. 소설은 바로 그 점을 보여준다. 힘이 없다는 이유로, 다르다는 이유로 선택당하고 배제당하는 사람들의 모습.


그렇다고 거기에만 머물지 않는다. 비록 지금은 선택당하고 배제당하지만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능동적인 존재임을 보여준다. 


배제당한 존재인 도영의 말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는데, 이 말이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라는 말의 의미라는 생각이 든다.


"... 강아지가 한 마리일 때는 힘이 약하잖아요. 근데 호랑이가 욕심껏 먹어서 강아지들이 오히려 더 많아지게 되었어요. 그래서 강아지들이 힘을 합칠 수가 있었대요. 강아지들이 힘을 합쳐서 호랑이를 물리쳤대요!"(371쪽)


이때 호랑이에게 먹히는 강아지들이 바로 마릴린 먼로다. 그러니 마릴린 먼로임을 인식했을 때 힘을 합칠 수가 있다. '나'가 아니라 '우리'가 되고, '마릴린 먼로들'이 된다. 그럴 때 선택당하고 배제당하는 존재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렇다고 똑같이 선택하고 배제하는 존재로 살아가지 않는다. 마릴린 먼로들은 선택과 배제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으로 감싸안는 존재가 된다.


설영이, 연정이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사랑'이다. 이 사랑은 다름을 인정한다. 다름을 다름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사랑이 된다. 또한 이 사랑은 배제된 사람들에게 배제되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역할도 하게 된다.


연정과 설영이 서로 소통하는 트위터 비공개계정 이름이 왓슨들이다. 왓슨은 셜록 홈즈가 사건을 해결할 때 같이 있으면서 그가 어떻게 사건을 해결했는지를 기록하는 사람이다. 여기서 기록이 중요하다. 기록은 남는다. 기억은 지워질 수 있어도 기록은 남는다. 기록은 결국 사건을 해결하게 한다.


그들이 계정 이름을 왓슨들이라고 지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건의 전모를 기록해두겠다는 결심. 단지 기록에 머물지 않는다. 기록을 통해서 변해간다. 자신들의 삶을 찾아간다. 


소설은 이렇게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과 그 과정을 통해서 다시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추리 소설의 기법을 택해 우리 사회에 여전히 만연하는 '위계에 의한 폭력'이 있음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연정이 성형외과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의사라는 이유로 특별한 까닭없이 당하는 일들과 설영이 박사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 여성이라는 이유로 받는 대우, 그리고 일본인 남성 신바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받는 배제는 소설 속 사건이 과거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음을 생각하게 한다.


하긴 우리가 힘이 있다고 여기는 직업에서도 성별이 얼마나 위계로 작용하는지는 몇 년 내 우리 사회에서 벌어졌던 일을 생각해 보라. 얼마나 많은 선택과 배제가 일어났고, 얼마나 많은 마릴린 먼로들이 있었는지를...


법을 통해 정의를 구현한다는 사법부에서 벌어진 온갖 성추행들, 사람을 살린다는 의사를 양성한다는 의대에서 벌어진 성추행들, 이렇게 사회적 위계에서 위에 있는 집단들에서도 다시 위계를 나누어 폭력이 행사되고 있는데, 사회적 위계에서 아래에 있는 집단들에서랴.


그러면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건을 없던 것으로 묻어버리는 일이 없게 기록하는 왓슨들이 필요하다. 이런 왓슨들로 많아져 배제당했던 사람들이 배제당하지 않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해야 한다.


이 소설, 한번 읽기 시작하면 끝을 보게 된다. 박진감 있게 전개되기도 하지만 읽으면서 느끼는 현실감, 그리고 분노. 단지 분노에 머물지 않고 한발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선택과 배제가 아니라 '사랑'이 먼저 작동해야 함을 생각하게 하는 그런 소설이다. 그러므로 왓슨은 바로 '사랑'을 기록하는 사람이다. 


소설 뒷부분에 있는 설영이 하는 말, "폭력에 폭력으로 대항하는 건 하수나 하는 일이죠."(376쪽)

이것이 이 땅의 왓슨들이 하는 말이고, 그들이 해야 할 일을 알려주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면서 읽게 한 소설이었다. 이런 소설을 쓴 작가에게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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