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랜드
천선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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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편의 소설이 묶여 있다. 발표 시기와 지면에 따라 내용이 다르기는 하겠지만, 전체적으로 통하는 무엇이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읽으면서 그 무엇을 찾는 일이 읽기를 더 재미있게 한다.


읽는 사람마다 '그 무엇'이 다를 수 있겠지만, 내게 이 소설집에서 찾을 수 있는 '그 무엇'은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가는 경계'다.


첫소설에서도 그렇다. 물론 천선란 소설이 SF소설이라는 평을 듣는 만큼 외계생명체의 존재나, 지구에서 살아가는 생명과는 다른 존재들이 등장하지만, 그런 존재들이야말로 이 세계에서 저 세계를 인식하게 해주는 문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즉, SF소설 자체가 경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실과 공상의 경계라고 하면 허황된다는 느낌을 주니까, 이 세계와 저 세계의 경계라고 하면 좋을 듯하다. 


처음에 실린 '흰 밤과 푸른 달'에서는 바로 지구를 떠나는 존재들이 나온다. 다른 생명체와 싸우기 위해 더욱 강하게 진화(?)된 인물들. 이들은 전쟁이 끝나자 지구인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외계 생명체가 언제 다시 올지도 모르지만, 외계 생명체가 없는 지구에서 위협적인 존재가 된 이들에게 선택지는 외계로 나가는 것이다.


자, 이들은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나가야 한다. 자발적이든 강요가 되었든 이들은 다른 세계를 향해 갈 수밖에 없다. 지구에 사는 우리들이 지구 밖으로 눈을 돌리는 일... 그런데 지구가 살 수 없어진다면, 당연히 우주로 가야 한다.


지금도 환경, 생태 문제로 지구가 견딜 수 없게 된다면? 하고 화성으로 이주를 꿈꾸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우주로 날아가는 새'라는 소설을 보면 지구를 떠나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온다. 이미 인간에 의해서 지구를 떠날 수밖에 없던 새들과 연결지어, 작가는 인간 역시도 그렇게 우주로 나갈 수밖에 없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푸른 점'이라는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을 연상시키는 소설. 그러나 태양계를 벗어나는 보이저호에서 보내온 사진은 푸른 점(지구)는 없다.


소설에서는 지구는 이미 푸른 점이 아닌 보이지 않는 행성일 뿐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푸른 점이어야 한다. 즉, 진실보다 믿음이 중요하다(106쪽)는 인물의 말처럼, 사람은 믿음을 잃지 않아야 살아갈 동력을 지니게 된다.


그렇다면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나아갈 때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진실이 아니라 믿음이다. 바로 자신들의 믿음을 공유하는 것. 그런 믿음의 공유가 인간들을 지구가 아닌 다른 우주로 나아가게 할 수도 있다. 우리가 여전히 우주에서 지구와 같은 행성을 찾을 수 있을 거라 믿고 있듯이. 또 지구와 다른 행성에서도 살 수 있다고 믿고 있듯이.


우주라는 공간만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나아가는 것은 인간 내부에서도 가능하다. 공간이 아니라 인간에게서도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있다. 자, 무엇이 그 사람을 결정하는가? 내가 나임을 무엇으로 증명하는가? 나와 남의 경계는 무엇인가? 또 남이 내가 될 수 있는 경계는 무엇인가? 


작가는 '기억'을 말하고 있다. '옥수수밭과 형'이란 소설에서 '사람은 다른데 똑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으면?'이란 주인공의 질문에 형은 '그래도 같은 사람이지.'(117쪽)라고 답한다. 그러면서 소설 속의 나는 여러 형을 만난다. 물론 여러 형을 동시에 만나지는 못한다. 같은 기억을 지니고 있는 형은 순차적으로 내게 나타날 뿐이다. 그리고 그 형들은 내게는 형이 된다.


같은 사람인데 '기억'을 공유하지 못하고 있으면? 같은 사람일까? 다른 사람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옥수수밭과 형'에서는 다른 인물들이 모두 형이 되는 남이 내가 되는 문이 열렸다고 한다면, '제, 재'라는 소설에서는 내가 남이 되는 문이 열렸다고 할 수 있다.


같은 육체 안에 있는 다른 기억을 지니고 살아가는 '제와 재'. 이들은 같은 인물일까? '제'에게는 '재'는 다른 사람일 뿐이다. 즉 제의 세계와 재의 세계는 다른다. 그렇지만 이들은 한 몸에 있다. 이 세계와 저 세계가 한 몸에서 공존하고 있는 것.


이를 좀더 확장한 소설이 '두 세계'라는 소설이다. 소설 속 인물이 '밖'으로 나가고 싶어한다. 자신을 옥죄고 있는 환경이 아니다. 그 세계가 아니다. 아예 다른 세계, 즉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넘어가고 싶어한다. 어떻게 해야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넘어갈 수 있을까?


표면적으로 보면 그 문은 바로 '죽음'이다. 죽음은 단절이다. 이 세계의 끝남. 그런데 이 세계의 끝남이 완전한 끝이 아님을 소설은 이야기한다. 소설은 본래 인물이 다른 세계를 찾아 떠나는 배에 타는 것으로 끝났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소설의 결말이 죽음으로 끝난다. 그 세계에서 공간의 이동이 아니라 아예 다른 세계로의 이동을 해야 하는 일... 죽음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리고 전혀 다른 시공간에 나타나게 된다. 다른 존재의 몸을 빌려서. 그렇다면 이 세계에 있는 존재는 또 어떤가? 다른 세계, 즉 밖을 꿈꾸는 인물들은 죽음으로 다른 세계로 간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않고...


굳이 육체적인 죽음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세계의 종교들이 대부분 거듭남이라고 하는 깨달음의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이 세계에서 죽음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저 세계에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 과정, 이 세계와 저 세계의 경계를 넘는 과정을 거치는 과정이 깨달음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천선란은 소설을 통해서 그 점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뿌리가 하늘로 자라는 나무'를 보아도 마찬가지다. 다른 세계를 잇는 존재는 이 세계를 넘어서야 한다. 이 세계에 발을 딛고 있으면 다른 세계로 넘어갈 수 없다. 그래서 소설 제목은 '노랜드'다.


'두 세계'라는 소설에서 주인공이 근무하는 곳이 '노랜드'인데 땅이 아니다 또는 땅이 없다로 생각할 수 있는 그런 곳. 이곳에서는 현실의 땅이 아닌 소설 속 땅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번 소설집을 관통하는 것을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넘어가는 경계'라고 한다면, 이 세계에 착 발붙이고 사는 존재들이 아니라 떠 있는 존재들이 나와야 한다. 그렇게 소설집에 나오는 인물들은 떠 있는 존재들이고, 이런 존재들이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각 소설들이 흥미진진하다. 재미도 있고, 무언가를 생각할 수도 있게 하고...작가의 말에서 '사랑하고 싶어 소설을 읽고, 삶을 알고 싶어 소설을 읽듯 가끔은 더 지치고 싶어 소설을 읽는, 나와 같은 사람이 또 있으리라 믿으며 두 번째 소설집을 엮어 당신께 보낸다'(418쪽)고 하고 있다.


사랑을 하고 싶어, 삶을 알고 싶어 소설을 읽는다는 말에 동의한다. 물론 더 지치고 싶어 소설을 읽는다는 말에는 동의하기 어렵지만, 소설에 나타나는 삶들을 내 삶들과 연결지으면, 소설은 결국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경계'라고 할 수 있으니...


이쪽 저쪽을 다 살필 수 있는 소설. 지칠 수도 있겠다. 그것은 끊임없이 자신을 극한으로 몰아가는 일이 될테니... 이런 경계의 체험, 새로운 문을 발견하는 일은 지치기도 하지만, 그 지침이 우리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고 있으니...


작가의 말처럼 소설을 읽자. 이 소설은 작가가 말한 세 가지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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