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악한 말들이 나돌아 다니는 이 시대. 겉으로 드러난 말들이 이리도 험악한데, 말 속에 들어 있는 의미는 얼마나 무시무시할까.


  최근에 '사형'이란 말을 많이도 들었다. 함께 할 수 없는 존재들... 사형에 처해도 마땅한 존재. 과연 사형에 처해도 마땅한 존재가 있을까?


  실질적 사형 폐지국이라고 하는 우리나라에서 한때 판사였다는 사람이 사형 운운하는 장면을 보는 일은 참 불편하다.


  특히 사법살인이라고, 나중에 무죄가 된 판결로 사형을 당한 사람들이 있는 이 나라에서, 자신이 판결을 내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같은 판사 출신이라면 그러한 판결에 대해서

끄러워하고, 또 '사형제'에 대해서는 많은 성찰을 했어야 하는데...


이 일에 대해서는 역사책도 좋지만 김원일이 쓴 소설 [푸른 혼]을 읽으면 더 생생하게 다가올 수 있다. 


차라리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으면, 아니 '사형'이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조정인 시집을 읽다가 말이 아닌 침묵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또는 말과 말 사이에 얼마나 깊은 심연이 있는지, 그래서 말 속에 들어 있는 무한한 함의를 파악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를 생각하게 됐다.


많은 시들이 있는데, 두 시를 연결지어, 지금 시국을 씁쓸하게 여기에 되었는데...


그 두 시는 '문신'이라는 시와 '말들의 크레바스'라는 시다.


              문신


     고양이와 할머니가 살았다


     고양이를 먼저 보내고 할머니는 5년을 

     더 살았다


     나무식탁 다리 하나에

     고양이는 셀 수 없는 발톱자국을 두고 갔다

     발톱이 그린 무늬의 중심부는 거칠게 패었다


     말해질 수 없는 비문으로

     할머니는 그 자리를 오래, 쓰다듬고 또 쓰다듬고는 했다


     하느님은 묵묵히 할머니의 남은 5년을 위해

     그곳에 당신의 형상을 새겼던 거다


     고독의 다른 이름은 하느님이기에


     고양이를 보내고 할머니는 하느님과 살았던 거다

     독거, 아니었다


     식탁은 제 몸에 새겨진 문신을

     늘 고마워했다


     식탁은 침묵의 다른 이름이었다


조정인, 장미의 내용, 창비. 2011년 초판 2쇄. 24-25쪽.


함께 함... 여기에는 살벌한 말은 없다. 살벌하게 느껴질, 식탁 다리의 자국들, 그것은 말로 표현되지 않은 말들이다. '말해질 수 없는 비문'이라고 했지만,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할머니는 그 자리를 오래 쓰다듬는 것이다. 고양이가 남긴 자국, 그것은 홀로 된 할머니로 하여금 고양이와 함께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고독의 다른 이름은 하느님이라고 하는 말은 여기서 통한다.


하느님은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하느님의 존재를 알게 될 때는 바로 고독할 때다. 사람이 철저하게 혼자 되었을 때, 그 때 비로소 하느님을 의식하게 된다. 할머니가 고양이가 떠난 뒤 고양이가 남긴 흔적과 함께 살게 되듯이. 그러므로 식탁은 할머니의 고독한 식사, 요즘 말로 '혼밥'이 아닌 함께 하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는 존재가 된다.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식탁은 함께 한다. 자극적인 말을 할 필요가 없다.섣부른 위안의 말을 할 필요도 없다. 그냥 그렇게 자신의 존재로 함께 할 뿐이다. 그러니 고독과 하느님과 침묵은 모두 홀로 됨으로써 비로소 함께 함을 깨닫게 될 때 하나가 된다.


이렇게 말이 아닌 말들을 통해 함께 함을 깨닫는다면, 말을 통해서는 어떨까? 표면에 드러난 말만이 아니라 감추어진, 말해지지 않은 말들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


아니면, 너무도 험악한 말들을 '크레바스'에 떨어뜨려버려야 하지 않을까. 두 시가 통하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말'을 통해서 어떤 말들이 우리 삶에 도움이 되는가를 생각할 수 있게 한다.


     말들의 크레바스


말의 수면 아래에는 극지와 극지를 잇는 레일이 있다


말과 말이 어긋나 레일이 끊긴 날 가만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쓸쓸하니? 우심실이 물어왔다 괜찮아, 먹먹한 좌심실이 대답했다

혀끝으로 싸락눈이 몰려 왔다 말과 말 사이 헛발 디딘 날


바람이 낸 길, 크레바스 깊은 골은 만년설의 마음이며 봉인된 입

마음이 밀리고 밀린 단애 밑으로 사랑해, 짧은 말마디가 뛰어내리면 뒤이어

쩌렁쩌렁 설산이 무너진다 누구에겐들 극지를 뒤흔드는

설원의 고함소리를 듣는 밤이 없었겠니?


해일을 일으키며 시작된 안개 무리가 해협을 건너고 초원을 건너

당신께 이르기까지 말은 자주 지워져 띄엄띄엄 새소리에 묻어 흩어지다가

길에 떨어진 단추나 깨진 접시, 돌멩이 따위에 가만히 엎드리기도 하는데


멀고 쓸쓸한 극지에서 태어난, 그보다 훨씬 먼 행성에서 날아온 씨앗에서 움튼

사랑해,라는 말에는 얼마나 자주 마음이 다녀가는지


당신과 내가 투숙하는 이쪽과 저쪽, 극지와 극지 사이 아득하게 레일이 놓였고

하루치 쓸쓸한 바람을 적재한 그날의 화물열차가 협곡을 지나간다


조정인, 장미의 내용, 창비. 2011년 초판 2쇄. 114-115쪽


'당신께 이르기까지 말은 자주 지워져 띄엄띄엄 새소리에 묻어 흩어지다가 / 길에 떨어진 단추나 깨진 접시, 돌멩이 따위에 가만히 엎드리기도 하는데'라는 구절에서 아, 앞에 나온 '문신'이라는 시에 나온 고양이 자국들을 이렇게 볼 수도 있겠구나. 즉 말이 엎드려 있는 그런 상태. 그러니 결국 식탁 다리에 있는 자국은 '사랑해'라는 말에 다름이 아니고, 이 '사랑해'라는 말이 고독한 상태에서 침묵으로 하느님을 만나는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크레바스에 빠진 말이 아니라, 크레바스에 빠지지 않고 다른 존재에 깃들여 우리에게 날아온 '사랑해'라는 말이라는 것. 그런데, 이런 말들이 아니라, 지금 우리는 크레바스에 빠진 말들, 아니 우리를 크레바스에 빠뜨리는 말들을 만나고 있다는 생각에 씁쓸해질 뿐.


[물은 답을 알고 있다]는 책이 한 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여기서 말의 중요성이 나온다. 말이 얼마나 우리 마음을 망가뜨릴 수 있는지, 반대로 말이 우리 마음을 풍성하게 할 수 있는지... 그러니 말을 통해서 우리를 크레바스에 빠뜨릴 수도 있고, 하느님과 만나게 할 수도 있다.


자, 당신은 어떤 말을 쓰겠는가? 어떤 말들을 상대에게 보내겠는가? 이 두 시를 읽으며 생각해 보자. 이 질문을 최근에 자주 언론에 나오는 분에게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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