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새'를 생각한다.
말과 당나귀가 교접하여 태어난 동물. 힘이 세어 일 부리는 데는 적격인 동물.
죽어라 일을 하고는 자신의 후손을 남기지도 못하고 죽음에 이르는 동물.
노새다. 일하는 동물이. 그런데 이런 노새 생각이 많이 난다. 요즘엔 특히 더.
노동자를 노새 취급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
경제성장, 선진국. 누구 덕인가? 일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인데... 지금, 노동자들이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가.
평생을 일했는데, 노후가 불안한 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일할 때는 열심히 열심히, 더 많이 더 많이 하라고 하더니, 막상 일을 놓으면 네 생계는 네가 책임지라는 식.
후손을 낳지 못하는 노새와 비슷한 대우를 받고 있지는 않은지...
양성우 시집을 읽다가 직접적으로 '노새'를 언급한 시 두 편을 발견하고는,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21세기가 되기까지 죽어라 일만 하고 살아온 노동자들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노새 일기
오늘도 천리를 걸었읍니다
큰 짐에 눌리고 굵은 채찍에
속으로 울며불며
입술 깨물며
지는 잎 산비탈 억새밭 지나
물을 건너 흙먼지 아득한
길,
오늘도 천리를 걸었읍니다. (예전 표기 그대로 쓴다. 요즘엔 '걸었습니다'라고 쓰지만)
양성우, 그대의 하늘길, 창작과비평사. 1996년 8쇄. 96쪽
노새의 꿈
끝도 갓도 없이 쌓이는 궂은일 속에서도
골고루 나누는 기쁨으로 넘치도록 행복하고
그리고 드디어 내가 사는 이 땅 위에
나란히 엎드려 가는 모든 이들과 함께 등 따숩고 배부르며,
오직 사랑을 위한 옳고 곧은 일 하나로
누구나 공연히 사람 손에 함부로 따돌림받지 않는
맑고 밝은 세상에서 내 맘대로 날개 펴고 살고 싶습니다.
내 두껍고 질긴 굳은살 겹겹이 저미는
이 긴 고삐 가시굴레를 모조리 벗고
얼씨구나 네 굽으로 곳곳의 기름진 흙을 차며,
한 사람도 빠짐없이 스스로 즐기는 일 속에서
나 또한 남들과 어울려 밤낮으로 땀에 절며
늘 넘치도록 행복하고 싶습니다.
양성우, 그대의 하늘길, 창작과비평사. 1996년 8쇄. 100쪽.
'노새 일기'에서 '노새의 꿈'으로... 과연 노새의 꿈은 실현되었는가? 긍정적인 답을 하고 싶지만, 아직은 아니다. 여전히 노새는 힘들게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노동자는 노새가 아니다. 노새여서는 안 된다. 노새 취급을 받아서는 안 된다. 자신의 생활을 누리는, '노새의 꿈'에 나오는 그런 삶을 살도록 해야 한다. 한데...현실은...
최일남이 쓴 소설 '노새 두 마리'가 생각난다. 죽어라 일을 하지만, 생활은 나아지지 않는 아버지를 노새에 빗댄 소설. 그 소설과 양성우 이 시들을 함께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노새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