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전달자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20
로이스 로리 지음, 장은수 옮김 / 비룡소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늘 같음 상태'만 유지되는 사회가 있을까? 질문을 하지 않는 사회. 아마도 그런 사회가 늘 같음 상태의 사회이리라.


질문은 나와 다름을 인식하고, 다름을 통해서 함께 하려고 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는데, 다름조차도 주어진 채로 살아가는 사회라면, 그래서 질문을 할 수 없는 사회라면 그 사회는 행복한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온갖 차별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차별을 없애는 일은 좋지만, 차별이라는 명목으로 차이까지 없애는 일, 차이를 없애기 위해서 선택조차 없애는 사회는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없다.


선택이란 다름을 인식하는 일. 또한 책임을 지는 일.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은 책임을 질 일이 없다. 자신의 생명, 직업, 가족 등을 선택하지 못하고 주어진 대로만 살아가야 하는 사회. 그 사회에는 미움도 질투도 없다. 다만 사랑도 우정도 없다. 그냥 주어진 대로 살아갈 뿐이다.


따라서 이런 사회에서는 기억도 없다. 개인의 기억, 집단의 기억이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해서는 안 된다. 기억이란 과거를 현재로 불러오는 일. 기억이 있다면 늘 같음 상태는 이루어질 수가 없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사회는 바로 그런 사회다. 모든 생활이 통제되는 사회. 하다못해 사람들이 통제하기 힘든 식욕, 색욕까지도 통제하는 사회. 가장 개인적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부도 위원회에서 지정해주는 사회니, 색욕이 발동할 수가 없다. 알약으로 해결해 버린다. 누구도 의문을 갖지 않은 채.


자신이 하는 행동 하나하나는 모두 감시되고 있고, 사회에 적응하지 못할 존재들은 '임무 해제'라고 해서 다른 세계로 보내진다. 말이 좋아 임무 해제지, 그것은 죽음이다. 그 사회에서 조금이라도 다른 존재들은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기억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기억은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는 지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돌발적인 상황이 생겼을 때 과거에서 해결책을 가져오는 역할을 누군가는 해야 한다. 그래서 그 사회는 누구도 기억을 가지면 안 되지만, 단 한 사람만은 모두의 기억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런 임무를 맡은 사람을 기억 보유자라고 한다.


그는 모든 기억을 갖고 있기에, 이 사회에서 유일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모두가 기계처럼 살아가는 사회에서 홀로 인간으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 고독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자신은 인류가 그동안 겪어왔던 기억들을 모두 소유하고 있으므로. 이렇게 기억 보유자로 선택된 조너스. 그가 기억을 전달받으면서 깨닫게 되는 일.


그가 살고 있던 세계가 진실한 세계가 아니었음을 알게 되고, 임무 해제가 무엇을 뜻하는지 진실을 알게 되면서, 그는 하나밖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사회에서 탈출하게 된다.


어쩌면 기억 보유자는 판도라의 상자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는 모든 기억이 담겨 있다. 이 기억은 그만이 간직해야지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서는 안 된다. 판도라 상자처럼 열려서는 안 된다. 이 사회는 그렇게 기억 보유자에게만 기억할 수 있는 책임을 지우고 있다.


하지만 조너스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기로 한다. 기억은 상자 속에 담겨 있기만 해서는 안 된다. 기억은 각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한다. 그렇게 기억을 사람들에게 돌려주려 조너스는 탈출한다.


그 다음은 아마도 혼란이겠지. 고통이겠지. 선택하지 않았던 삶에서 선택하는 삶으로 돌아간다는 일은 고통과 용기를 수반하니까. 또한 책임을 동반하니까. 


소설은 조너스가 떠난 다음 마을을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조너스가 희망을 품고 다른 세계로 가는 장면에서 끝난다. 마찬가지다. 조너스가 마을을 떠날 때 겪게 되는 고통, 좌절을 마을 사람들도 겪게 되겠지.


눈 내리는 날, 언덕을 힘겹게 조너스가 오르듯이, 마을 사람들도 돌아온 기억 때문에 힘겨움을 겪게 될 터이다. 다만 조너스는 언덕에 올라 다른 세계를 본다. 다른 세계로 갈 썰매를 탄다. 마을 사람들도 아마 이 힘겨움을 겪으면서 누군가는 내리막을 달리는 썰매를 탈 것이다.


이렇게 소설은 디스토피아 세상을 그리고 있다. 사람들은 아무런 의문 없이 살아가고 있지만, 그들에게는 '행복'이라는 말은 있을 수 있어도 행복을 느낄 감정은 없다. 그러니 '사랑'이라는 말은 쓰일 수가 없는 사회다. 


"절 사랑하세요?" ... "아버지 말씀은 네가 매우 일반화된 단어를 사용했다는 거야. 그 단어는 너무 무의미해서 거의 쓰이지 않게 되었지." ... "넌 이렇게 물었어야 했어. '어머니 아버지는 저와 즐거우세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래'란다." (216-217쪽)


이런 사회다. 개인의 감정은 철저하게 감춰야 하는 사회. 이런 사회에 책은 필요없다. 책은 해악이다. 그래서 이 사회에서는 책을 읽을 수가 없다. 책의 존재조차 알리지 않는다. 기억 보유자에게만 책은 존재한다.


'늘 같음 상태'가 바로 이렇다. 하지만 기억의 저장소는 책이다. 또 늘 같음 상태에 균열을 내는 것은 예술이다. 기억 전달자가 된 전 기억 보유자는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조너스는 색깔을 볼 수 있는 능력(미술이라고 해도 좋겠다)이 있었다. 예술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 그런 능력이 그들을 기억 보유자가 되게 한다.


하나의 세계로 달려갈 때 여러 세계를 보게 만들어주는 역할, 그것이 바로 예술의 역할임을 소설은 잘 보여주고 있고, 책은 인류의 기억 저장소임을 말해준다.


그러니 이 소설은 과거의 소설이 아니라, 고도로 발전해 가는 세계, 앞으로 최첨단 아이티(IT) 기술이 발전해, 인공지능을 비롯한 기술발전으로 디지털화 되어 가는 세상에서 아날로그적 삶에 대해서 생각해야 함을 제시하는 미래 소설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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