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감함을 칭송하는 경우는 많아도, 두려움을 칭찬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두려움은 나약함이고, 남에게 드러내면 안 되는 결점으로 인식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삶창 131호를 읽다가 '두렵다고 말하라(박총)'는 글을 읽고 '맞아, 그래야 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려움은 행동하기 전에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래서 앞뒤 재지 않고 행동하지 않게 한다. 신중함, 두려움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다.


물론 두려움에 먹히면 안 된다. 용감함에 먹혀서도 안 되지만, 두려움에 먹히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다만, 두려워 해야 할 것은 두려워 해야 한다.


남에게 해를 끼칠까 봐 두렵다는 말, 좋은 말이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한번 더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런데 남에게 해를 끼칠까 봐 두렵다는 말을 자기 합리화 하는데 쓰면 안 된다. 그것은 두려움에 먹힌 모습이다.


두려움을 지니지 않은 사람, 이런 사람은 남을 배려하지 않는다. 자기가 하고자 하는 쪽으로 밀고나간다. 그러면서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을 나약한 사람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런 사람들이 나약한 사람일까? 신념으로 총을 들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이 과연 나약한가? 그들이 총을 들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겪는 일들은 나약함과는 거리가 멀다. 어려움을 감내하면서 그들은 총을 들지 않는다.


다른 존재들에 대한 사랑이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고, 그런 두려움이 다시 용기로 나아가게 한다. 그리고 이 글의 마지막 문장 '두렵다고 말하라. 두렵다는 말을 들으라. 그리고 함께 걸어가라'(40쪽)이 마음 속에 박힌다.


삶창 이번 호를 읽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 다른 존재들이 살아가는 모습 등을 만나면서, 또 시를 통해서 삶을 만나게 되어서 좋았는데... 이인휘의 산문 마지막 부분이 마음을 울린다.


과연 그때 그 장면이 과거에만 머물고 있을까? 이런 말들이 지금도 통할까 봐, 두렵다. 그런 말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 몇 십 년을 지내왔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이인휘 산문을 읽으면서 들었으니... 


"난 공장 다니는 아이들 싫어. 그리고 그 모자 너무 창피해. 공부 열심히 해서 대학 가길 바랄 테니 다시 찾아오지는 말아줘." (102쪽)


지금 말로 하면 초등학교, 그때 말로 하면 국민학교 때 사귀었던 아이가 돈이 없어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고등공민학교 교복을 입고 찾아왔을 때 부유한 집안 딸이었던 아이가 한 말.


경제적 차이로, 학벌 차이로 이렇게 단절이 되는 사회, 이젠 그런 사회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왜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가 기어나오는 느낌이지. 그러면 안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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