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 실린 시들이 새로운 기법을 시험했는지, 낯설기는 하지만, 뒤로 갈수록 이해할 수 있는 시들이 실려 있다.


  디졸브(dissolve)라는 기법을 사용했다고, 시집에서 말하고 있는데, 디졸브란 한 이미지에서 다른 이미지로의 점진적인 변화를 말한다고 한다.


  그러니 이 시집들은 앞 장면과 뒤 장면이 장면 전환이 된다고 할 수 있는데, 사실 앞 시와 뒤 시라기보다는 한 시에서 제목과 시의 끝에 시인이 다른 글을 붙임으로서 디졸브가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읽을 때 시와 또다른 글들을 순차적으로 읽어야 하는데, 제목을 읽기 전에 그 쪽 맨 밑에 있는 글을 읽고 제목과 시를 읽고 마지막으로 시 끝에 실린 글을 읽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아니면 표시대로 제목을 읽고 글을 읽고 시 내용을 읽고 다시 글을 읽든지.


그럼에도 이 시집에 실린 첫번째 시는 시인의 글이 없다. 그냥 표시만 있다. 왜 그럴까? 시집 전반을 관통하는 내용을 짐작하라는 뜻일까?


시집에 실린 첫시는 '불온서적'이란 시다.


불온서적


벗 

대학시절

청년노동자

우리들의 하느님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다 



김현, 입술을 열면, 창비. 2018년. 10쪽.


지금 다시 하고 싶은 말이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은. 그런데 시집을 한 참 읽어가다 보면 다시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이 처음이 되는 시가 나온다. '빛은 사실이다'라는 시.


   빛은 사실이다 




☽ 투표하고 이름 없는 것과 박물관에 다녀왔다. 박물관은 시간 때문에 넓었다. 남들이 보지 않는 역사에서 입을 맞췄다. 무덤을 나오며 팔짱을 뺐다. 쏘맥을 마셨다.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졌다. 이름 없는 것이 밤으로부터 흘러나왔다. 근육이 사라진 목소리였다. 한번도 눈 뜨지 않았다.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다


오늘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슬픈 

시를 쓴다


모르긴 몰라도

빛이 묻는다


네 시의 정권은

나를 만나면서도

왜 영원히 어둡니?


나는 동성애자의 손목을 본다

사랑이 연역한 뼈라는 것을 생각한다


나는

빛에게 새끼처럼 매달린다

머리 쓰다듬어줘


끼 부리지 마

빛은 머리카락을 골고루 만져주고

밤이 되고 새들도

벌써 확정이라고 뜨는구나

이름 없는 것이 이름 없는 것으로 날아가 이름 없는 국가를 이루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진실의 열쇠는 둘만이 아는 어둠에 있다


오늘은 혼자 눈 닫지 말자

대통령의 나라를 위해 보건에 힘쓰자


빛의 말씀은 

공공연하다


잠 속에서도

우리는 손을 잡을 수 있고

역사의 힘일 수 있고

독재타도 유신철폐

민족해방 조국통일

구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노동권을 보장하라

혐오와 차별 없는 세상을 외칠 수 있으나

우리는 눈을 부릅뜬다


지금부터 평등한 밤이다


모든 거짓은 

사실로부터 시작된다



☽눈을 떴다. 겨울 아침이었다. 더웠다. 출근 가운데였다. 남들이 보는 생활에서 이기고 싶었다. 젊은이들의 얼굴을 눌러보았다. 늙인이들의 얼굴을 열어보았다. 우리는 졌다. 어젯밤 이름 없는 것이 이름 없는 것을 내려다보며 청했다. 된다고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되어줄래. 그래. 사람은 어떻게 근육이 되는가. 사랑은 눈 앞이 컴컴한 밤의 정부에서.


김현. 입술을 열면. 창비. 2018년. 150-153쪽.


눈 뜨지 않았다가, 다시 눈을 떴다. 그런데 아직도 컴컴하다. 긴 시간 동안 터널을 빠져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터널 속에 있다. 어두운 터널. 출구가 어디일까? 출구까지 얼마나 남았을까? 앙상한 뼈만 남아서는 제대로 걸을 수 없다. 버틸 수 없다. 근육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근육을 어떻게 키우지?


이런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말이 더 필요없다. 이 시 마지막 구절, '모든 거짓은 / 사실로부터 시작된다'는 말.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무엇이 거짓이고 사실인지 이제는 섞여서 구분하기 힘들다. 사실을 살짝 비틀어 거짓을 만든다. 


그러면 안 된다. 몇 년 전 겨울 아침. 우리는 다시 봄 아침에 이런 일을 겪었는가? 아닌가?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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