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주부들이 집에서 하는 가사노동을 그림자 노동이라고 한다. 우리 삶에 꼭 필요한 일이지만 어떠한 대가도 지불하려 하지 않는 노동. 그래서 보이지 않는 노동이 되고, 보려고 하지 않는 노동이 되기에, 일을 하면서도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

 

  어디 이런 일이 가사 노동뿐일까? 우리 사회를 둘러보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가 보려고 하지 않는 곳에서 사회를 유지시키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없으면 사회가 유지되기 힘듦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외면당하고 있다. 마치 없는 존재처럼, 아니면 공기처럼 그렇게 하는 노동이 당연하다는 듯이.

 

  과연 그럴까? 그들을 보려 하지 않는 태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태도가 바로 그들을 우리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배척하는 태도 아닐까.

 

서로 어울려 살아야 한다면서도 애써 우리 시야에서 보이지 않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들의 존재가 드러나면 마치 문제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자신들에게 꼭 필요할 때만 그들을 소환하지는 않았는지... 그 다음에는 토사구팽도 아니고, 그냥 다시 없는 존재로 취급하고 만 경우가 많은데.

 

문태준 시집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을 읽으며 시집의 마지막에 실린 시 '일원'을 읽으면서 이렇게 모두 모여 함께 살아가는 존재가 바로 우리들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일원

- 바라나시에서

 

  누운 소와 깡마른 개와 구걸하는 아이와 부서진 집과 쓰레기더미를 뒤지는 돼지와 낡은 헝겊 같은 그늘과 릭샤와 운구 행렬과 타는 장작불과 탁한 강물과 머리 감는 여인과 과일 노점상과 뱀과 오물과 신(神)과 더불어 나도 구름 많은 세계의 일원(一員)

 

문태준,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창비. 2015년. 80쪽.

 

이렇게 우리는 세계의 일원으로, 그냥 맑고 깨끗한 세계가 아니라 '구름 많은 세계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자신만으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우리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일원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존재들이 있지 않은가. 일원이 아니라 마치 다른 존재인 것처럼, 그들을 배척하고 자신들만의 세계를 공고하게 구축하고 있지 않았는가.

 

마치 자신의 눈에 보이는 존재, 그것도 자기 밑이 아니라 자신과 동등하거나 위에 있는 존재들과만 어울리고, 그들을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살지는 않았는지.

 

이 '일원'이란 시에서 펼쳐진 세계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위만 보아서는 안 된다. 밑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문태준의 이 시집 첫번째에 나온 시를 볼 필요가 있다. 이 시집의 처음과 끝이 이렇게 연결될 수 있음을.

 

  몸을 굽히지 않는다면

 

노랗게 잘 익은 오렌지가 떨어져 있네

붉고 새콤한 자두가 떨어져 있네

자줏빛 아이리스 꽃이 활짝 피어 있네

나는 곤충으로 변해 설탕을 탐하고 싶네

누가 이걸 발견하랴,

몸을 굽히지 않는다면

태양이 몸을 굽힌, 미지근한 어스름도 때마침 좋네

누가 이걸, 또 자신을 주우랴,

몸을 굽혀 균형을 맞추지 않는다면

 

문태준,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창비. 2015년. 10쪽.

 

고고하게 홀로 유유자적 하면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다른 존재를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살기 위해서는 이렇게 자신의 몸을 굽힐 필요가 있다. 자신을 낮추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그제서야 보이지 않던 존재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로 인해서 우리가 삶을 영위하고 있었음을, 그동안 보이지 않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일원이다. 몸을 굽혀야 일원이 될 수 있다. 이런 행위는 그들을 자신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넘어서 자신이 그들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고 받아들이게 된다.

 

이렇게 문태준 시는 우리가 세계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몸부터 굽힐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사람뿐만이 아니라 다른 존재들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세상의 모든 존재를 일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래야만 자신도 그들과 일원이 될 수 있다.

 

모두가 우리인 일원인데, 어찌 보인다, 보이지 않는다고 또는 중요하다 중요하지 않다고 편을 가르고 나누는 삶을 살 수 있겠는가.

 

시인은 그런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우리는 모두 일원이라고, 우리 모두 몸을 굽힐 줄 아는 존재가 되자고 시집에 실린 첫시와 끝시를 통해서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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