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를 읽으며 에셔를 생각했다. 이것과 저것이 함께 존재하는,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른 존재를 발견하는, 그러나 둘은 함께 존재할 수밖에 없는 그런 그림.


  에셔 그림을 검색해 보면 참 다양한 그림들이 나오지만, 논리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그림들이 많다. 그만큼 우리 세상은 논리로만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이거다라고 딱 잘라 말하기 힘든 것들이 많음을 깨닫게 된다.


  마찬가지다. 이창기 시 중에 '도처에 죽음이 너무 많구나'를 읽으면 그러한 에셔의 그림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살아있음에서 죽음을 발견하게 되는 시. 이 시는 처음에 살아있음으로 시작하여 죽음으로 끝난다. 마치 에셔 그림에서 천사와 악마가 함께 있어서 어느 부분을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듯이.


도처에 죽음이 너무 많구나


개울물에 발을 씻다

흘러내린 바짓가랑이로

물을 빨아올린다

새순 돋듯

나 갑자기 눈이 부셔

실눈을 뜨니

도처에 살아 있는 것투성이구나!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코카콜라처럼

날뛰고 있다


배고프겠구나

세상의 물줄기란 줄기를 죄다 뜯어먹으렴

그 잔뿌리 잘라 지붕에 말려

두고두고 국 끓여먹으렴


개울물에 발을 씻다

흘러내린 바짓가랑이로

물을 빨라올린다

도처에 죽음이 너무 많구나!


이창기, 이생(生)이 담 안을 엿보다. 문학과지성사. 1997년. 20쪽.


시를 따라가다 보면 살아 있는 것들의 환희에서 죽음으로 넘어가게 된다. 아주 자연스럽게 같은 행동에서 다른 결과를 이끌어내게 된다. 왜 아니겠는가?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죽음들에 빚지고 있다는 것이다.


죽음이 없으면 삶도 없다. 그러니 삶이면 다른 존재들의 죽음에 바탕하고 있는 것. 즉, 도처에 '살아 있는 것투성이'라는 감탄은 '도처에 죽음이 너무 많구나'라는 깨달음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렇다면 삶을 허투루 살 수 있을까? 아니다. 수많은 죽음에 기대고 있는 삶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고 더 잘 살아야 한다. 그래서 삶과 죽음, 죽음과 삶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함께해야만 하는 존재다.


더 확장하면 한쪽 면만 보지 말고 반대 면도 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세상은 단 하나만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으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