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현대문학상 수상시집을 읽었다. 최근 시들의 경향을 알 수 있게 해준다는 생각에 거의 의무적으로 읽기는 하는데... 심사위원들이 호평을 하는 심사평을 읽으면서 참, 나와 거리가 멀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하긴 심사위원들은 시의 형식이나 실험 등도 고려하면서 시의 다면성과 완결성을 판단하겠지만, 나는 내 마음에 와닿느냐 닿지 않느냐로 판단을 하니, 그들의 판단과 내 판단이 일치할 리는 없다.


  일치하지 않더라도 공통점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이번 수상시집에 선정된 시들은 대체로 길다. 길어서 한 쪽으로 끝나는 시가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다.


두 쪽, 세 쪽 넘어가는 시들이 많다. 예전 같으면 단편서사시라고 했겠다. 장시라고 하거나. 도대체 사람들이 시를 읽어도 외워서 즐길 수가 없다.


아무 곳에서나 시를 읊조리는 문화를 이루려면 시가 좀 짧아야 하지 않나. 무슨 조선시대처럼 사서삼경을 달달 외우는 것도, 판소리를 외우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하지만 시가 길어지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를 찾고 받아들였으면 좋겠는데, 아직은 거기까지 가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번 수상시집에서 유희경의 '교양 있는 사람'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교양 있는 이라는 말은 긍정적으로 쓰이는 말인데, 가끔은 비꼬는 말로도 쓰일 때가 있다. 이 시에서 교양 있는 사람은 내게 한껏 기대를 주지만, 기대를 충족시키지 않고 계속 나를 기다리게 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교양 있는 사람, 우리가 참 많이 기대했던 사람, 그런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다가 윤동주 시 '팔복'이 생각났다. 교양 있는 사람을 기다리는 '나'는 팔복에 나오는 슬퍼하는 사람이지 않나 하는 생각.


교양 있는 사람


  교양 있는 사람은 노크하며 묻는다 똑똑 계십니까 교양 있는 사람이여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문이 없군요 당신을 위해 던져버렸으니까요 그것은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반듯하게 접힌 손수건을 꺼내 자신의 선한 이마를 훔친다 경치가 훌륭하군요 여기까지 올라오는 동안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답니다


  나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기다린다 어서 그가 말해주기를 한 층 한 층 올라설 때마다 떠올렸던 영광된 기억과 희망 찬 미래의 이야기들을 거기서 얻어낸 빛나는 영감들 그리고 그가 낚아챈 상념의 거센 발버둥과 울음소리에 대해서도


  몹시 피곤하군요 그는 졸린 눈으로 나를 본다 나는 그에게 의자를 가져다주고 그러면 교양 있는 사람은 자리에 앉아 깊은 잠에 빠지는 것이다 이런 일은 매번 반복되지만 나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는 내가 기다리는 교양 있는 사람이고 언젠가 내가 기다리는 말을 해주리라는 사실을


2020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현대문학. 2019년. 15쪽. 유희경, '교양 있는 사람' 전문


어떤 면에서 윤동주 시가 떠올랐을까. '매번 반복되지만'이라는 시구에서였을 것이다. 윤동주 팔복은 마태복은 5장 3-12절을 비튼 시인데...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가 여덟 번 반복되다가 맨 마지막 구절에서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로 끝난다. 이 시구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로 바꾸고 싶어졌고, '저희가 영원히 기다릴 것이오.'로 끝내고 싶어졌다.


기다림... 기대... 그래서 환호하고, 그를 맞이하기 위해 어떤 장애물도 다 없애놓았는데 ('여기에는 문이 없군요/당신을 위해 던져버렸으니까요') 그는 내가 기대한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말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행동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그냥 그 자리에서 침묵한다. ('깊은 잠에 빠지는 것이다')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 나는 그를 위해 준비했는데, 그는 나에게 왔을 뿐, 내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는다. 그러니 윤동주 시에서 슬픔을 기다림으로 바꿀 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태복음에는이렇게 나온다.


1.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2.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3.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4.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5.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6.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7.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8.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태복음 5장 3절-11절)


그래서 12절에서는 예수로 인하여 핍박받은 자들은 천국에 이를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팔복이다. 이들은 현세에서는 어려움을 겪지만 결국에는 복을 받는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윤동주에게는 영원히 슬플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면, 이 시 속의 '나'에겐 영원한 기다림일 수밖에 없다. 교양 있는 사람이 내게 준 것은 기다림이다.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영원한 기대.


'나'가 왜 교양 있는 사람을 기다릴까? 그것은 그가 '영광된 기억과 희망 찬 미래의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들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과거와 미래를 현재에 들여올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 기대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우리에게 들려주지 않는다. 그냥 잘 뿐이다.


그러니 교양 있는 사람을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된다. 그의 입만을 바라보아서는 안된다. 그런 생각을 이 시를 통해서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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