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8
헤르만 헤세 지음, 박병덕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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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작품이다. 싯다르타.


우선 싯다르타 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부처다. 고타마 싯다르타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이 소설 제목을 보고 부처의 이야기구나 하고 생각하기 쉽다. 작품을 읽지 않으면 저지를 수 있는 실수가 바로 싯다르타가 부처라고 생각하는 일이다.


소설 속 인물은 싯다르타는 부처와 다른 인물이다. 부처와 만나는 장면이 소설에 나오기는 하지만, 주인공은 부처가 진리를 말로 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부처의 제자가 되기를 거부하고 떠난다.


그러니 부처와 이름이 같은 절대 진리를 추구하는 한 인물의 이야기라고 하면 된다. 이 소설은. 물론 소설을 읽다보면 싯다르타가 부처가 되어 감을 알 수 있다. 부처가 무어라고 했나. 우리 모두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부처가 되기 위해서 말에 의존해야 하는가? 글에 의존해야 하는가? 아니다. 그래서 부처는 나중에 아무 말도 없이 손가락을 들어 보이지 않았는가? 말에 의한 깨달음이 아니라 부처가 살아온 하나하나가 모두 진리가 되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부처의 말을 달달 외운다고, 어느 때고 부처께서는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산다고 해서 진리를 깨우쳤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진리는 자신의 삶을 통해서 깨우쳐야 한다. 주인공 싯다르타가 한 말이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그는 나중에 친구였던 고빈다로부터 부처의 모습과 같은 모습을 지녔다는 말을 듣는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가 부처가 될 수 있음을 이 소설을 통해서 깨닫게 된다. 부처가 하고자 했던 말이 바로 독일의 작가에 의해 소설로 표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깨달음의 과정은 치열하다. 너무도 어렵다. 싯다르타는 젊은 시절에 자신의 뛰어난 능력으로 진리에 대한 욕망을 키우고, 그것을 목표로 정진한다. 하나의 목표를 세우고 자신을 나아가게 하는 것. 이것은 그 목표와 어긋나는 모든 것들을 배제한다는 부작용이 있다. 마치 경주마처럼 양 옆을 가리고 앞만 보고 달려가는 꼴이 되기 십상이다.


싯다르타 역시 마찬가지다. 뛰어난 능력으로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 집에서 나와 사문이 되고 결국 고타마 이야기를 듣고 그를 만나지만 그에게 머물지 않고 또 길을 나선다. 자신만의 진리를 찾아야 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이 목표를 이루는데 그가 겪는 일은 여자를 만나 사랑을 하는 일, 재산을 불리는 일에 참여하여 향락에 빠지는 일 등이다. 세속적 욕망을 거치지 않고 진리를 깨닫는 일이 얼마나 허망한 것임을, 젊은 싯다르타가 이런 일들을 겪는 과정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 일들의 허망함을 깨닫고 다시 길을 나서 강가에서 나름대로 해탈의 경지에 이르지만 아직은 부족하다. 자, 무슨 일을 겪어야 하나? 그것은 바로 자식에 대한 사랑이다. 세상 어떤 사랑보다도 끊기 힘든 것이 자식에 대한 사랑이다. 맹목적 사랑. 이것은 진리의 세계에 도달하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자식에 대한 사랑은 자식을 자신과는 다른 독립된 존재로 인정하기보다는, 자신의 영향 아래에 있는 존재로, 끊임없이 자신이 보살펴야 하는 존재로 인식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를 떨쳐내지 못하면 자식을 독립된 존재로, 즉 스스로 살아가야 하는 존재로 인정하지 못하게 된다.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싯다르타도 자식에 대한 사랑만은 어쩔 수 없어한다. 온갖 고뇌를 겪은 후에야 자식을 놓아줄 수 있게 되지만, 그 과정이 만만치 않다. 또한 다른 존재들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다. 못난 존재를 동정할 수는 있지만 그들이 자신과 똑같은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기까지는 너무도 오래 걸린다.


오죽하면 불교에서도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이 있겠는가. 그런데 이 책, 싯다르타에서는 개를 넘어서 돌멩이도 나라는 존재와 같다는 인식이 나와 있다. 하나의 존재는 모든 존재이고, 모든 존재는 하나의 존재로 나타난다는 것.


그러므로 하나에는 모든 것이 들어 있으니, 서로 다른 존재는 없다는 것. 여기에서 시간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바로 여기에 모든 것이 있으니까. 과거도 미래도, 그리고 다양한 모든 존재들이 바로 지금 존재하는 것에 있으니까.


이렇게 바라문의 아들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어가는 과정을 소설로 쓴 것이다. 무엇보다도 깨달음은 지식의 차원이 아니라 지혜의 차원이고 이것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는 것.


스스로 깨닫기 위해서는 체험해야 한다는 것을 소설에서 말해주고 있다. 싯다르타가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얻게 되는 진리는 진리 추구라는 하나의 목표를 정해 오직 그것을 향해 매진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삶을 살면서 그것들이 다른 것이 아님을 깨달아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앞으로 앞으로만 달리지 말고 옆도 보고 함께 존재하는 다른 존재들을 받아들이며 사랑으로 함께 어울리는 것이 진리라는 것, 그래서 싯다르타는 강가에 머물면서 강이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더 큰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간다.


강은 어느 하나의 소리만을 들려주지 않는다. 모든 소리들이 강의 소리에 들어 있다. 그것을 들을 수 있는 순간. 이미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싯다르타. 꼭 불교라는 종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마도 부처의 이름인 싯다르타라는 이름으로 불교를 연상하기도 하지만, 이 소설은 어느 특정 종교의 이야기로 국한해서는 안된다.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사람이 진리를 찾아가는 구도 소설, 또는 한 사람의 성장소설로 읽어야 한다. 그러면 적어도 삶의 자세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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