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 읽으며 제목이 정말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어떻게 제목을 붙일 수 있을까? 시 제목이 '제목을 붙일 수 없는 슬픔'이다. 차마 제목을 붙이지 못하는.
이육사 시 '청포도'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러지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라는 말.
청포도에 전설과 하늘이 함께 들어와 있다는 것인데, 이는 과거와 미래가 현재에 함께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게 현재는 과거와 미래에서 벗어날 수 없다.
과거와 미래를 부정하는 현재는 제대로 된 현재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거를 부정하면서 살아오지 않았던가. 우리나라가 이루었던 근대화라는 것은 과거와의 단절 아니던가.
과거를 받아들여 미래로 나아가는 디딤돌로 삼은 것이 아니라 과거는 그냥 엎어버려야 할 유물로만 취급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지내온 우리는 뿌리뽑힌 삶을 살아가게 되지 않았던가. 그런 생각을 한다. 청포도 시와 전혀 상반되는 세상을 우리가 살아가고 있지 않나 하는 슬픈 생각.
제목을 붙일 수 없는 슬픔
할아버지가 돌아가지자
국민학교 출신 아버지는 무덤을 만들어주고
중학교 출신 그의 아들은 10년 후
어느새 아예 그 무덤을 없애버리고
그 자리에 밭을 일구어 고구마를 심고
20년 후, 또 그의 손자는 그 밭마저
아파트업자들에게 미련없이 팔아버리고
아 그리하여 옛사람의 그림자도 사라졌다네
김준태, 꽃이 이제 지상과 하늘을. 창작과비평사. 1994년. 77쪽.
이게 시적 표현에 불과할까. 아니다. 이렇게 지내온 것이 우리 현실이다. 하지만 옛것이 무조건 좋다는 것을 떠나서 옛것은 모두 사라져야만 할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그냥 엎어버리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옛사람의 그림자도 사라졌다네'라는 말이 들린다면, 우리가 무엇을 위해 이토록 달려왔던가. 이렇게 과거를 지운 사회가 행복한 사회일까? 아닐 것이다.
오에 겐자부로가 쓴 글 중에 '아이들이 왜 학교에 가야 하는가'에서 학교는 과거와 현재를, 과거의 사람과 나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나를 다시 미래로 연결지어 주기 때문에 가야한다는 의미의 글이 있었다.
학교가 존재하는 이유가 그것이라면, 우리가 지금을 살아가는 이유도 이것이다. 과거와 미래를 현재에 이어 함께 살아가는 것. 그래서 과거를 잊고, 과거를 밀어버리고 살아가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시인은 그 점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현실에 어떻게 제목을 붙일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일이 되풀이 되지 않게 해야 하지 않을까. 시를 읽으며, 하루하루 급변하는 이때, 다시 과거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