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거리두기, 또는 생활 속 거리두기. 여기에서 중요하게 여겨야 할 낱말은 거리두기다. 거리두기란 밀접한 관계를 맺지 말라는 말이다. 불가근 불가원이라는 말이 중립을 지킨다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관계를 포기하라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너와 밀접한 관계를 맺지 않겠다. 그래서 너무 가까이 하지도, 너무 멀리 하지도 않겠다. 그냥 그렇게 아는 사람으로만 지내겠다. 따라서 이 한자어는 사회적 거리두기나 생활 속 거리두기와 어울리는 말이 된다.

 

  그런데 사람은 사회적 동물, 정치적 동물, 놀이하는 인간 등등으로 불리고 있다. 사람이 인간이라는 한자로 불릴 만큼 사람은 홀로가 아니라 함께 존재한다. 그런데 거리두기를 하지 않으면 고소, 고발을 당한다. 처벌을 받는다.

 

자, 어떤 사람들에게 거리두기는 아무런 고통을 유발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자족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이들에게 거리두기는 엄청난 고통을 일으킨다. 그들의 삶은 자족적이지 않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맺기를 통해서만이 삶이 온전해 지기 때문이다.

 

이 거리두기란 말이 우리 사회에 들어온 지 어언 8개월이 되어 간다. 길거리에 다니는 사람들 얼굴에는 거의 전부 마스크가 씌워져 있다. 2미터 이상 거리를 둔 야외에서는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된다는 방역 지침이 있지만, 그것은 지침일 뿐이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 거리에 나가 보라.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을 수밖에 없다. 넌 뭐냐? 너 때문에 우리가 코로나19에 걸려도 되냐?는 식의 눈총.

 

거리두기뿐이 아니라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다니는 시절이 되었다. 이럴 때 누가 가장 고통 받는가? 이런 물음을 던져야 한다. 그리고 코로나19를 겪고 있는 이 시대에는 가장 고통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정책이 우선해야 한다.

 

장애인들, 비정규 노동자들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정책이 우선되어야 하는데... 과연 그러했던가? 오히려 자본가들을 위한 정책이 먼저 만들어지지 않았던가 반성해야 한다. 그 점을 이번 [삶이보이는창] 122호에서 짚어주고 있다.

 

여전히 노동은 나중에 고려해야 할 대상이 되고 있으니 이번 호에 실려 있는 글들을 읽으면 우리 삶을 지탱해주는 노동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적어도 경제 위기를 핑계로 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한 제약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 노동을 중심에 둔 정책, 사회적 약자를 중심에 둔 정책이 수립되어야 한다는 것.

 

[삶이보이는창] 122호를 읽으며 그 점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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