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인간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1
랠프 엘리슨 지음, 조영환 옮김 / 민음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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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서 계속된다. 동지회에 가입해서 그는 승승장구한다. 자신이 기획하여 사람들을 조직하고 이끌어낸다. 그런데 어느날 이상한 편지를 받는다. 조심하라고? 백인들이 너를 끌어내릴 수도 있다고. 그러다 위원회에서 비판을 받고 할렘의 일에서 손을 떼라는 명령을 받는다. 여성문제에 대한 연설을 하는 쪽으로 옮긴다.

 

여기서 흑인 문제보다 더 열악한 것이 여성문제다. 여성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임하지 않는다. 이 소설에 나오는 여성문제에 관심이 있는 여성들. 백인여성들이 다수다. 그것도 이런 운동을 하는 흑인 남성에 관심을 가진.

 

흑인 여성들은 여성운동에서서 뒤처져 있다. 앞으로 나서기가 힘들다. 그들은 이중으로 억압받고 있다. 흑인이라는 인종 정체성과 여성이라는 성 정체성. 이 둘이 그들을 함께 억누르고 있다. 그러니 흑인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흑인 남성으로 살아간다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다.

 

백인 여성들의 우월감, 또는 흑인 남성을 성적 대상으로 여기는 그런 모습들이 소설에서 묘사가 되고 있는데, 그 당시 백인 여성들이 또는 남성들이 흑인 남성을 보는 관점 중의 하나가 성적 대상으로서의 흑인 남성이었을 것이다. 지적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흑인 남성은 성적 능력이 뛰어난 존재로 여겨지는 그런 편견.

 

그러다 다시 할렘으로 돌아온 주인공. 왜냐하면 그가 조직했던 할렘의 조직들이 붕괴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일했던 클리프톤이 경찰에게 사살당했을 때 그는 장례식을 조직한다. 그러나 동지회에서는 이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들에게는 흑인들의 시위가 관심 대상이 아니었던 것.

 

그들은 흑인들이 자신들을 넘어서는 위상을 지니기를 바라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들의 지도에 따르기를 바랐을 뿐. 동지회라고 평등을 추구하는 조직에서도 이럴진대, 주인공은 자신이 이용당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다고 흑인지도자, 선지자를 자칭하는 폭력을 선동하는 라스와 함께 일할 수는 없다. 라스 역시 그런 폭력으로 백인들의 위상을 공고하게 할 뿐이다. 맹목적인 폭력은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더 어려움을, 오히려 백인들이 흑인들을 고립시키기 위해서 폭력을 유발하기도 한다는 것을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결국 할렘가는 폭동에 휩싸이고, 방화, 약탈, 폭행, 총기 난사 등등...이는 흑인 사회를 궤멸시키는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지하로 숨어들어 그곳에서 살아가게 되는 주인공.

 

그는 자신이 옳은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행동했지만 많은 부분에서 남에게 이용당했음을 깨닫는다. 억압받는 상태를 이용해 자신들의 영향력을 높이려는 사람들이 꽤 많음을 이 소설은 보여주고 있는데...

 

미국에서 흑인으로 살아가는 일은 '보이지 않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일이다. 그는 존재하지만 그의 존재를 대부분 힘있는 백인들은 의식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필요할 때만 그의 존재가 소환된다.

 

백인의 필요에 따라 또는 백인의 욕구를 대변하는 흑인의 필요에 따라 이용당하는 존재, 그런 존재임을 깨닫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렇게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제대로 파악하는 일은 무척 힘들다. 특히 억압받는 존재에게는 더욱 그렇다.

 

백인 지배 세상에서 백인처럼 되고자 그들을 무작정 따라하는 그룹. 그들은 분명 존재한다. 왜냐하면 그런 그들이 있어야 대다수 흑인들을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 그들은 소수다. 몸도 마음도 백인화 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남을 볼 수 있는 사람은, 특히 약한 존재를 볼 수 있는 사람은 그런 축에 들지 못한다.

 

그렇다면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데...그것이 쉽지 않다. 동지와 적을 구분하기가 너무도 어려운 것이다. 동지의 탈을 쓰고 함께 하는 적도 있고, 자신보다 더 선명한 구호를 가지고 자신의 일을 방해하는 적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억압받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지하로 스며들었음에도 여전히 희망은 남아 있음을 이 구절을 통해 보여준다.

 

'내가 낮은 주파수로 여려분을 대변하는지 누가 알겠는가?' (373쪽)

 

현대 미국에서는 플로이드 사건과 같은 일이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이게 민주주의 국가에서 가능한 일인가? 그럼에도 우리는 미국을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는 우리가 배워야 하는 국가로 여전히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여전히 이 소설은 유효하다. 아직도 흑인들은 주인공이 살았던 시대에서 그리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위 출세한 흑인 일부분. 여전히 굶주리면서 언제 경찰의 총에 맞을지 모르는 대다수 흑인. 여기에 더 많은 억압을 받는 흑인 여성들...

 

인류는 여전히 불평등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인공지능이 인간이 하고 있는 일 대부분을 차지할 거라고 걱정하고 있으면서도, 인간들이 서로를 구분하여 차별하는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으니... 이성적인 인간?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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