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메시스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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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 모를 감염병이 창궐한다. 왜 나타났는지, 어떻게 전개될지, 누구에게 옮아갈지 알 수가 없다. 그럴 때 사람들은 공포에 빠진다. 공포에 빠지지만 이성은 마비된다. 이성이 마비되면 희생양이 필요해진다. 자신들의 공포를 분노로 대체하고 분노를 통해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 일어난다.

 

결국 인간은 자신들의 인식 너머에 있는 것에 공포를 느끼며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희생물을 찾는다. 그런데 그 희생물은 멀리 있지 않고 가까운 곳에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을 지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과도한 책임의식이 있는 사람은 어떨까? 남에게 책임을 미루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책임이 없음에도 그것이 자신의 책임인 양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원인 모를 감염볌에 대처할 수 있을까? 오히려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사람보다도 더 감염병에 대처하지 못하는 것 아닐까?

 

필립 로스의 소설 [네메시스]를 읽다가 네메시스는 보복의 여신, 복수의 여신인데, 왜 이 소설의 제목을 이렇게 붙였을까 생각하게 됐다. 책임감이 강한 유대인 젊은이가 주인공인데,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떠한 나쁜 짓도 하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더 다른 사람을 위해 일을 했는데...

 

소설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고, 첫번째와 세번째 부분의 서술자는 같다. 바로 주인공 캔터 선생이 놀이터 감독으로 있을 때 그곳에서 함께 있던 아이다. 그리고 두번째 부분의 서술자는 작가로 추정할 수 있다. 즉, 첫번째 화자가 캔터 선생과 함께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두번째 부분에서 서술자가 바뀌고, 세번째 부분에서는 세월이 흐른 뒤에 캔터 선생을 만나게 되기 때문에 다시 첫부분의 서술자로 바뀐다.

 

그런데 서술자의 태도가 확 변한다. 물론 캔터 선생에 대한 애정에는 변함이 없지만, 어린 시절 자신들의 우상이었고, 몸도 좋고 운동도 잘하고 이탈리아 출신의 불량스런 아이들에게 대처를 잘하던 캔터 선생에 대한 이야기에서, 폴리오를 겪고 나서 장애인이 된 캔터 선생을 이야기할 때는 비판적인 시각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왜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낼까? 자신에게 책임을 다하려던 젊은이에게 왜 네메시스는 나타났을까? 그것은 자신이 굳이 책임지지 않아도 될 문제에 깊이 관여해서 자신의 정신과 몸을 갉아먹은 캔터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자기 책임으로 돌리는 사람이 있으면 정작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책임을 지지 않으며, 애매한 사람이 희생당할 수가 있다. 캔터가 바로 그런 부류의 사람이다.

 

결국 소설의 끝부부에서 서술자는 캔터 선생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신에게 맞서지 마세요. 지금 이대로도 세상에는 잔인한 일이 흘러넘쳐요. 자신을 희생양으로 만들어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들지 말라고요" ((273쪽)

 

이 말 다음에 이런 말이 서술되고 있다.

 

'세상에서 망가진 착한 소년만큼 구원하기 힘든 사람은 없는 법이다. 그는 너무 오랫동안 혼자 자신만의 상황 감각을 키워왔기 때문에 - 또 간절하게 갖고 싶어했던 모든 것을 갖지 못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 내 힘으로는 그가 자기 삶의 끔찍한 사건을 해석하는 방식을 몰아낼 수도 없고 그와 그 사건의 관계를 바꾸어놓을 수도 없었다.' (273쪽)

 

'대신 가혹한 의무감에 시달리면서도 정신의 힘은 거의 타고나지 못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의 이야기, 시간이 갈수록 그의 불행을 강화하고 치명적으로 확대하는 이야기에 아주 심각한 의미를 부여해 큰 대가를 치렀다.' (274쪽)

 

이것이 바로 네메시스가 캔터에게 나타난 결과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몰랐다. 즉, 자신이 어디까지 책임지고 나머지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알지 못했기에 폴리오에 걸린 아이들을 자기 탓으로 돌렸다.

 

어떤 일에 대해서 이렇게 무한책임을 지는 사람이 선할 사람일까? 물론 이런 사람이 많다면 사회는 조금 더 갈등없이 돌아갈 수도 있겠지만, 그 자신은 견딜 수 없게 된다. 자그마한 일에도 신경쓰며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자기 책임이라는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된다. 문제의 본질을 놓치게 된다. 결국 책임이라는 가상의 덫에 빠져 현실의 세계에서 제대로 살아갈 수가 없게 된다. 캔터는 다른 방식으로 살 수도 있었다. 결혼도 하고 남들처럼 살아갈 수도 있었다. 바로 이 소설의 서술자가 한 것처럼. 그렇게 하지 않은 캔터는 자신에게 무한책임을 지는 것이다.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보복을 하는 것이다. 네메시스!

 

폴리오에 감염되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여기에 대처하는 모습이 달랐기에 이들의 삶도 달라진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말을 빌리면 캔터는 "왜?'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네메시스에게 걸려들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어떤 일이 생겼을 때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왜 하필이면 내게?'라고 생각하면 자꾸만 원인 규명으로 빠져들고, 자기 책임의 늪으로 끌려들어간다. 거기서 허우적거리다보면 현실에서 자꾸만 멀어지고, 자신은 세상에서 도태되게 된다.

 

'왜?'라는 말대신 '어떻게?"로 사고를 전환해야 한다. 이미 벌어진 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고민하고 행동해야 한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생각하면 자기 책임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다. 늪에서 빠져나올 밧줄을 구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이든 다른 사람이든 충분히 벗어날 수가 있다.

 

캔터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는 '왜?'에 매달린다. 그래서 신을 원망하기도 한다. 원망한다고 해서 일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과거로만 가고 있을 뿐이다. 현실에서 미래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 삶인데...

 

폴리오라는 소아마비로 알려진 병이 유행하던 때를 중심으로 소설은 펼쳐지지만, 감염병이 주인공이 아니라 그것에 대처하는 사람이 주인공이다. 그것도 감염병에 대해서 별다른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될 사람이 과도하게 지닌 책임감 때문에 파멸해 가는 모습을 그린 것.

 

그는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했음에도 공포에 잠식당한 사람들에게 배척당하고, 자신의 잘못이 아닐지도 모르는데도 끝내 자신의 책임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해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

 

바로 이럴 때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가 찾아오는 것 아니겠는가. 이 소설을 읽으며 폴리오는 주로 어린아이, 젊은이들을 공격했지만, 지금 코로나19는 나이 많은 사람, 병약한 사람에게 치명적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소설에서 격리나 공포, 또는 치료제 없음으로 인한 불안 등등은 지금 우리의 모습을 어느 정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려 하는 것도 문제지만, 모든 것을 원인을 규명하는 데로만 돌려 네 탓이라고 하는 것도 문제가 있으며, 일부 선량한 사람들이 혹 자신이 전파자가 아닐까 지나치게 우려하는 것도 - 물론 적당한 우려는 반드시 필요하다 - 문제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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