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을 읽으면 앞부분은 서정적인 시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자연과 더불어 살고자 하는 마음을 주로 표현했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읽다보면 몽고와 이루크추크가 나온다. 다른 나라 같지만 분단과 전쟁으로 우리나라와 연결되어 있다.

 

  우리 역사를 알면 이 시들에서 표현된 것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일제강점기에 그쪽으로 갔던 사람들. 전쟁 이후에 그쪽에서 살게 된 사람들. 이념을 떠나 이국에서 만나게 된 사람들 이야기가 나온다.

 

  점점 분단이라는 우리나라 현실로 접근해 간다. 이제 시집 뒷부분에서는 직접 언급한다. 남북 분계선을, 금강산 관광으로 함께 만날 수 있던 사람들을.

 

왜 그럴까 생각했더니, 시집 뒤에 시인의 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시인은 남북 분단의 비극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추스리기 힘들었나 보다. 그가 마음을 추스리고 낸 시집이 바로 이 시집이다.

 

   '당시엔 고통을 드러내고 남북이 정서적으로 화해를 이루는 생명적인 시들을 쓰고 싶었는데 현실은 '우리들의 땅'조차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체험적인 진실과 창조적인 진실 사이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시를 버렸다. 그 뒤 고통스럽게 몰려오던 혼란과 방황, 그리고 동족으로부터의 소외, 그게 내가 감당해야 할 삶의 양식이었다. 이 시집은 오랫동안 아물지 않던 그 몸부림의 흔적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비무장지대에 떠도는 젊은 영혼들에게 이 시집을 바치고 싶다.' (156쪽)

 

그렇게 금강산 관광을 하게 되면서 남북 관계가 완화되기 시작하고, 평화의 기운이 번지기 시작했을 때 시인은 시를 통해 자신이 경험했던 세계를 형상화하 한다.

 

그런데... 지금은? 시인은 다시 절망에 빠지지 않았을까? 한참 앞으로 달려왔다고 생각했는데, 그 자리로 다시 돌아와 있다니. 하지만 포기해서는 안 된다.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지만 그 자리는 예전의 자리와 같지 않다. 그만큼 앞으로 달려온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시집 제목이 된 시를 인용한다. 길지만, 시인의 말에 나온 말들을 가장 잘 포함하고 있는 시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그대가 누구인지 몰라도 그대를 사랑한다

 

  물안개 속에 떠오른 공제선이

  문득 남북으로 갈라선다.

 

  땅속으로 잠복호 밀어 넣고

  얼핏 눈에 감겨오는 푸른 강줄기

  목에 가슴에 두르고

  물안개에 싸여 돌아오는 새벽

 

  바람이 분다, 태극기가 펄럭인다.

  바람이 분다, 유엔기가 펄럭인다.

  나란히 펄럭이는 두 깃발 사이로

  골짝에서 능선으로 누가 올라온다. 정지! 하고 소리쳐도 서는 시늉만 한다. 손도 올리지 않고 흰 손수건도 없이 머리 숙이고 흐느적 흐느적 걸어 올라온다. 내 몸속에서 아득히 누가 소리친다.

  (기다려, 거기부터 가시철망

  기다려, 거기부터 지뢰밭

  기다려, 거기서 손바닥 보이게

  두 손 들고 머리 들고 뒤돌아서!)

 

  물총새! 따오기!

 

  간신히 한마디씩 주고받았지만 양미간에 걸친 흰 능선이 늘어진다. 가까이 다가올수록 온몸이 따가워진다. 분계선에서 번개인지 폭우인지 불안인지 공포인지 한덩어리가 되어 숨결 으스러지게 포옹하고 서로 정신없이 갈 길 간 뒤 이틀 당겨 만나는 우리

  가시철망 앞에 두고

  마주보고 말도 없이

  위험 표지판처럼 서 있는

  우리는 누구인가?

 

  물총새 따오기 물총새 따오기

  물따총따새따 물따총따새따

 

  오십 개의 스피커에선 조금씩

  암호에서 풀려나온 노랫말이 가락 잡아

  언덕 위에 '하얀 집'을 올리고 있다.

 

  잠복조는 군화 신은 채 '하얀 집'으로 올라간다. 돌아오면 축축한 매트리스에 깃털 빠진 침낭에 발고린내 나는 잡념만 남아도 노래 흐르는 대로 흐르다 제 곡조 찾아 들어간다. 조상병은 집 나간 아내 찾으러 다니고, 연애편지 대필하던 김병장은 담장에 호박넝쿨 걷어올리다 고향 냇가를 기웃기웃, 남쪽 끝자락에 홀어머니 두고 온 김일병은? 문안 편지 끝에 모월 모일 보리타작하고 모월 모일 일손 빌리고 텃밭엔 채소만 심으라고 추신 붙이다 잠들리.

 

  우리는 벙커 속으로 내려간다. 희미한 불빛 등지고 침상 모퉁이에 앉는 그대, 작전 포기하고 밤새 분계선을 넘어와 다시 분계선 앞에 웅크리고 있는 그대, 무슨 소리가 들리는가? 팀장인가? 키퍼인가? 살아 있는가? 오고 있는가? 구석으로 어두운 곳으로 기울어가는 그대, 딸딸이가 울릴 때마다 고쳐 앉자 줄담배 연기 속에 눈만 내놓고 딸딸이를 구석으로 밀었다 앞으로 당겼다 두 손 가득 얼굴 감싸는 그대, (나는 나의 핏줄이 아니고 그대는 그대의 핏줄이 아니고, 우리는 우리의, 민족의 핏줄이 아니고 아니고 아니고 무엇인가?)

  지지난밤 불붙은 소나기에 머리 데고 오늘은 벙커 울리는 발자국 소리에 가슴 데는 그대, 나도 불기운 스친 얼굴 무심히 감싼다. 그대 마음 쏠리는 곳, 동쪽으로 서쪽으로 가다 보면 물 한바가지 마시고 엎어버린 고향 논두렁길에 이르리, 얼음판에 살구꽃 복사꽃 피우는 얼굴들 딸려나오리.

  (그러나 살아서는 돌아갈 데가 없는가

  살아서는 혼도 지닐 수 없는가)

 

  흘러간 먹구름 하늘 덮어 번져오고

  죽은 병사의 부러진 발목

  덜렁덜렁 무릎을 치고

  돌아갈 데 없는 그대를 향해

  중천을 돌고 도는 해,

 

  통문 지나 먼지 속에

  지프차 한대 들어온다,

  캄캄해진다, 후르르륵

  등줄기에 불이 붙는다.

 

  그대 먼발치에서라도 보고 싶다던 그 사람은? 어머니도 애인도 아닌 그 사람은? 그대가 남긴 담배꽁초와 초조한 눈빛과 어두운 몸짓과 암호 속에 떨려오던 그대 목소릴 깊이 간직하리, 살아 있는 동안 떨리는 목소리 울려오는 곳에서 떨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꿈꾸고 피 흐르는 대로 시를 쓰리. 나를 넘어 그대를 넘어 이념을 위하여 이념을 버리고 민족을 위하여 민족을 버리고

  잘 가라, 두 깃발 사이

  우리 땅 어디에도

  있지 않았던 그대여,

  그대가 누구인지 몰라도 그대를 사랑한다.

 

신대철, 누구인지 몰라도 그대를 사랑한다. 창비. 2005년.119쪽-1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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