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체크.당통의 죽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9
게오르그 뷔히너 지음, 홍성광 옮김 / 민음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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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히너의 희곡 작품집이다. 약력을 보니 1813년에 태어나 1837년에 세상을 떴다. 겨우 24세. 그런데도 그는 지금도 우리에게 읽히는 작품을 남겼다. 아무리 그때라 해도 지금으로 따지면 겨우 대학을 갓 졸업했거나 아니면 졸업을 유예하고 대학에 남아 있거나 또는 취업이 되지 않아 대학원에 진학해 있는 경우가 많은 나이다.

 

그만큼 우리들이 세상에서 자리잡는데 시일이 뒤로 미뤄졌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수명이 배 이상 늘어났으니, 조금 늦어도 상관은 없겠다.

 

병에 걸려 일찍 세상을 떴는데,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어떤 작품을 남겼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지금도 읽히는 작품을 남겼으니...

 

<보이체크>란 작품은 미완성이라고 한다. 질투에 눈이 멀어 아내(정부)를 죽인 보이체크 이야기. 그런데 질투에 눈이 멀기 전에 그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사람을 온전한 존재로 인정하지 않고 무슨 실험대상처럼 여기는 사람들. 그런 사회에서 제정신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를 생각해야 한다. 결국 사람들의 심성이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 그 개인의 성향이기도 하겠지만 사회 분위기나 또는 다른 사람들의 태도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니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지우는 일은 삼가야겠다. <당통의 죽음>은 프랑스 혁명을 중심에 놓고 이야기를 펼쳐 나간다. 이 작품은 완결된 작품이고, 당통 반대편에 서 있는 인물로 로베스피에르가 나온다. 우리가 배운 자코뱅파의 지도자.

 

<당통의 죽음>에서 생각할거리는 바로 혁명에 대한 것이다. 혁명은 개인의 윤리만으로 지속되지 않는다. 혁명이 왜 필요한가? 그것은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다. 결국 혁명은 내가 행복하지 않으면 그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당통이 변절자인지 아니면 희생양인지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할지 모른다. 그런 역사적인 평가를 넘어서 이 희곡만 가지고 판단하면 당통의 입장이 이해가 된다. 

 

혁명이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코뱅파는 계속 피를 요구한다. 반혁명 분자는 말할 것도 없고 이제는 혁명세력 내부에서도 숙청의 바람이 분다. 정권을 잡지 않으면 단두대에 오르게 된다.

 

민중들은 여전히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으며 혁명을 일으킨 자들 내부에서는 권력다툼이 한창이다. 혁명에 대해서 서로 다른 입장이 되고 패배한 쪽은 단두대에 서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혁명일까? 혁명의 순간에 피를 부르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면, 혁명 이후에는 그 피를 더이상 흘리지 않게 해야 하지 않을까? 지속적으로 피를 부르는 혁명을 혁명이라 할 수 있을까?

 

혁명이 성공한 사회에서 다시 혁명을 지속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피를 필요로 한다면 그런 혁명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을까?

 

인간의 감정을 도외시하고 윤리만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사는 사회가 과연 행복한 사회일까? 이 희곡에는 무결점 도덕주의자 로베스피에르가 나온다. 그는 도덕으로 사회를 지배하려 한다. 그런데 사회가 도덕만으로 유지될까? 사회를 지탱하는 기본 요소는 바로 빵 아닌가.

 

빵이 충족되면서 동시에 장미도 충족되어야 한다. 그것들이 조화를 이루게 하는데 도덕이 사람들 내면에 자리잡아야 하며, 최소한의 법률로써 규제가 되어야 한다. 먹을거리와 문화, 그리고 도덕과 법.

 

사회를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요소이지만, 법만을 앞세워서도 도덕만을 앞세워서도 안 된다. 공자 역시 도덕을 중시했지만 관용이 필요하다고 그래서 덕치(德治)가 되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진시황은 법가를 받아들여 중국을 통일했지만, 그 이후에 다시 중국을 통일한 한나라는 법가가 아니라 유가를 받아들인다. 혁명이 성공하기까지는 법가가 필요할지 몰라도 사회를 유지하는데는 유가가 필요한 것이다. 즉 법치보다는 덕치가 더 사회를 지속되게 할 수 있다.

 

철저한 윤리국가는 사람들 숨통을 막는다. 사람들을 견디게 할 수 없다. 이런 철저한 윤리는 법의 엄정한 사용을 부른다. 일탈은 허용되지 않는다. 하지만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일탈이 허용되었을 경우에 자유롭다고 느끼며 살아간다.

 

조화를 이루고 서로 평화롭게 사는 마을에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함께 산다. 도덕군자도, 법률가도,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도, 또 마을에서 지탄을 받는 사람도. 그 어떤 사람을 매몰차게 쫓아내거나 마을에 받아들이지 못하면 그 마을의 조화는 깨지고 만다. 사회도 나라도 마찬가지다. 범위를 넓혀서 우주로 확장해도 마찬가지다.

 

다양성. 어느 하나로 수렴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향으로 발산하는 것. 그것이 혁명이 추구해야 할 지향점이다. 그런데 <당통의 죽음>을 보면 그렇지 않다. 혁명이 일어난 뒤 하나로 수렴하려고만 한다. 그러니 죽음을 부를 수밖에.

 

수많은 죽음으로 사회가 계속 지탱할 수는 없다. 희곡은 정신이 이상해진 여인이 끌려가는 것으로 끝나지만 프랑스 혁명은 로베스피에르의 처형으로, 다시 왕정으로 되돌아가는 쪽으로 진행된다.

 

바로 다양성, 관용이 부족한 혁명 정부가 초래한 일이다. 하여 뷔히너의 <당통의 죽음>은 혁명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지식인들, 정치인들의 생각 속에 갇힌 혁명이 아니라 민중의 삶이 나아지는, 그리고 다양한 삶들이 인정되고 서로 조화를 이루는 그런 혁명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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