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보이는 창 2020.봄호를 읽다.

 

  봄은 봄이되 봄이 아닌 상태로 여름을 맞이하는데, 이것이 코로나19가 우리에게 준 영향이라면, 삶창에서는 이 사태를 어떻게 볼까 궁금하기도 했다.

 

  사실 이러한 재난은 누구에게나 다 영향을 미친다고 하지만, 그 영향의 강도는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재난에 대응을 할 수 있는 사람과 대응하기 힘든 사람이 있기도 하고, 어쩔 수 없이 그런 재난 상황에서도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는 사람도 있다.

 

  삶창은 주로 어쩔 수 없는 사람들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러한 재난 상황에서 더 고통을 받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있음을, 재난으로 인해 그들에게서 눈을 돌려서는 안 됨을 삶창이 보여주고 있다.

 

눈길을 끄는 사진이 있다. 코로나19는 누구나의 관심사였다. 오랜 철탑농성은 언제부턴가 관심을 끌지 못했다. 삼성해고자 김용희씨의 서울 강남역 사거리 농성이라는 사진이 책의 앞부분에서 마음을 끈다.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코로나19에 쏠려 있다. 언론들도 마찬가지다. 삼성부회장인 이재용이 대국민사과를 한 것은 방송으로 내보내면서도 삼성에서 해고된 노동자가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고공농성을 하는 것은 다루지 않는다. 이들의 외침이 허공에 머물고 있다.

 

이토록 절박한 외침이 코로나19라는 재난에 묻혀버리면 이것은 이들에겐 이중고가 된다. 이들은 이중, 삼중, 사중으로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 질병으로, 해고로, 탄압으로, 그리고 사회적 무관심으로. 이게 바로 이들이 나아갈 수 있는 한계다.

 

이들은 자신들을 알리기 위해 위로 위로 올라가지만 그만큼 사람들에게서도 멀어진다. 절박함이 자꾸 자꾸 멀어지고 사람들은 당장 자신에게 닥친 일이 아니라고 외면하고 만다.

 

재난시대에 더 고통받는 사람이 있음을, 박일환 시인이 쓴 '시인의 시선'에서 더 절박하게 느낄 수 있다.

 

죽어서도 차별받는 사람들이 있음을, 그것도 열사들의 묘역이 모여 있는 마석 모란공원에서도 있음을 이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모란공원에서 만난 차별의 경계 지점'이라는 글이다. 장애인 운동가 우동민 열사가 숨졌을 때 묘지를 마련할 돈이 없어 화장을 하고 모란공원에 그의 유골을 묻으러 갔을 때, 휠체어를 탄 장애인 동지들이 갈 수 있는, 딱 거기에서 우동민 열사를 묻을 수밖에 없었다는... 묘지가 아니라 유골을 묻고 팻말을 세워둘 수밖에 없음을...

 

다행히 코로나19라는 재난 상황에서 전국민에게 재난기금을 주기로 했다. 재난기금이라는 말보다는 기본소득이라는 말이 더 좋을 것 같다. 기본소득 논의로 더 나아가면 좋겠다. 누구나 생계는 유지할 수 있도록 국가가 보장하는, 기본소득이라는 말이 그렇다면 기본배당이라고 하자. 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당연히 받아야 할 배당.

 

우리 모두는 이 사회가 유지되게 하는데 꼭 필요한 사람이니 그에 대한 배당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 여기에는 어떤 차별도 필요 없다는 것. 누구나 똑같이 배당을 받으면, 그것으로 생계가 해결이 된다면, 재난 상황에서도 좀더 버틸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다른 글들도 많지만 이 사진과 이 글이 마음을 울린다. 재난은 평등하게 다가오지 않음을... 다른 글들도 읽을 만하다. 삶이 보이는 창을 우리들도 지녀야 함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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