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녀 이야기 (리커버 일반판, 무선) 시녀 이야기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김선형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설정 자체가 끔찍하다. 인간을 이렇게 통제할 수가 있다니.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빅브라더를 이 소설에서는 도처에서 만날 수 있다.

 

빅브라더라는 전제 권력만이 아니라 주변 모든 사람들이 감시자가 될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에서 자유란 무엇일까? 자유란 결국 복종하는 것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체제를 벗어나거나 거부하려는 행동들은, 또 생각들은 처절하게 처벌을 받는다. 그것도 법에 의해서이기도 하지만, 속박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서도.

 

시녀들... 빨간옷을 입은 다른 사람의 아이를 낳아주어야만 하는 여자들. 그들의 목표는 오로지 출산이다. 출산을 하지 못하면 이들은 쫓겨난다. 쫓겨남. 그것은 사람이 견딜 수 없는 일을 하는 곳 (소설에서는 콜로니라고 나온다)으로 보내지거나 또는 죽음을 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성이되 비여성이 되는 것.

 

소설은 이렇게 남성중심의 사회를 그리고 있다. 철저히 통제되는 사회. 남성중심이라고 하지만 남성들에게도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자유로운 것은 최고 지배층에 속하는 일부에게만 해당할 뿐이다. 장벽에 자주 걸리는 시체들. 그들은 체제를 부정하거나 다른 종교를 믿거나 다른 신념을 지닌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죽음은 홍보를 위해서도 늘 전시된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사회에서 시녀가 된 여성이 나온다. 오브프레드. 세상에 모든 시녀들 이름은 오브로 시작한다. 오브(of). 소유격이다. 여성은 자신의 이름을 빼앗긴다. 누구의 것으로만 존재하게 된다. 자기 이름을 잃는다. 아니 빼앗긴다.

 

반면에 이름을 지닌다는 것, 독립된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먼 미래 소설들을 보면 이름이 없다. 그냥 몇 호 몇 호라고 하든지 아니면 다른 명칭이 주어진다. 이름이 있으면 자아의식이 생기고, 주체적으로 행동하려는 마음이 생긴다.

 

하여 예전부터 지배자들은 피지배자들에게서 이름을 빼앗으려고 했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이름을 몇 개나 가지고 있으면서도 (족보에 올라가는 이름과 친구들 사이에서 불리는 이름 또 자신의 작품에 저자를 명기할 때 쓰는 이름 등, 본명에 호니 자니 해서 자신을 잘 드러내는 이름을 붙이며 살았다) 평민이나 천민들이 제대로 된 이름을 갖게 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냥 돌쇠, 개똥이 등이었을 뿐이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시녀들은 모두 오브로 시작되는 이름을 갖는다. 자신이 어떤 사람집에 사느냐에 따라 그 이름을 자연스레 갖게 된다. 그러니 다른 곳으로 가거나 죽임을 당하면 다른 사람이 그 이름을 그대로 쓴다.

 

끔찍한 환경이다. 가정을 이루고 살던 사람이 한 순간에 가정을 잃고 자기 딸도 빼앗기고, 시녀가 된다. 아이 낳는 기계가 되는 것이다. 아이를 낳지 못하면 쓸모 없어진 기계 취급을 받아 폐기처분되듯이 사라져야 한다.

 

이런 과정을 시녀의 독백체로 담담히 풀어나간다. 그렇지만 상황은 비참하다. 철저한 디스토피아다. 자신들은 유토피아를 건설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주장일 뿐이다. 다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유토피아는 없다. 그것은 디스토피아 또는 지옥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세계일수록 다른 생각이나 행동은 용납하지 않는다. 체제 유지를 위해서 무력과 비밀경찰들에 의지한다.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게 한다. 그리고 철저하게 계급을 나눈다. 도처에 감시자, 밀고자가 있는 사회. 이런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 끔찍한 일이다.

 

특히 여성을 아이 낳는 기계 취급하는 사회, 이 길리어드 사회에서 여성은 지배층의 아내를 제외하고는 하녀나 시녀가 된다. 경제 활동부터 정치 활동까지 어떤 활동도 할 수 없다. 오로지 재생산을 위해서만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여성들을 감시하고 교육하는 존재로 여성을 불러낸다.

 

하지만 이런 사회에도 틈은 있다. 사람들을 아무리 옥죄어도 숨쉴 틈을 발견해 내는 것이 사람이다. 저항한다. 어떤 세상에도 저항하지 않는 사람만으로 구성된 사회는 없다. 오웰의 '1984'에서도 저항하는 사람이 나오고,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도 소위 야만인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저항하는 집단이 있다. 이들의 암호는 '메이데이'. 주인공은 저항단체에 의해 구출된다. 그렇게 소설은 끝난다. 아니 소설은 후일담으로 아주 오랜 후일에 주인공이 녹음한 소리를 정리하고 분석한 학자의 발표로 끝난다.

 

그런 사회가 있었음을. 시녀의 이름은 끝내 밝히지 않는다. 프레드 역시 누군지 밝히지 못한다. 다만 추정되는 두 명의 인물이 있음을 학자의 발표가 말해주고 있다. 지배층 역시 숙청을 당하고 기록이 말살되는 것이다.

 

여성이 가장 심하게 억압당하고 있는 사회에서 남성들 역시 자유롭지 않고 또 지배층 역시 자유롭지 않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그러면 억압받는 존재가 있는 사회에서는 그 누구도 자유롭지 않고, 언제든 억압받는 존재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지배하는 권력자도 지배받는 사람들도 자유롭지 않은 사회, 그런 사회를 좋은 사회라고 강변하는 언론들, 그 가치를 스스로 내면화 한 사람들. 이 소설은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시녀인 화자를 통해 들려줌으로써 그런 사회가 얼마나 끔찍한지를 생각하게 하고 있다.

 

지금 사회는 이 소설에 나오는 길리어드보다는 많이 세련되어 있지만 감시 사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코로나19로 우리들 행동 하나하나가 얼마나 쉽게 남들에게 공개되는지를 몸소 체험하지 않았던가.

 

내 행위들이 모두 기록으로 남는 시대, 또 그것을 남들이 알아낼 수 있는 사회, 정보가 집적됨으로써 정보를 관리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넘겨지는지를 생각하는 요즘인데, 이 소설을 읽으며 지금 우리 사회가 소설 속 길리어드처럼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소설 속 길리어드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많이 다르지만, 그런 직접적인 폭력은 나타나기 힘들지만 더 세련된 체계가 작동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우(杞憂)... 그래, 이런 생각은 기우여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