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야의 이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7
헤르만 헤세 지음, 김누리 옮김 / 민음사 / 200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는 무엇일까? 우리는 왜 살아가고 있는가? 또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이런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을까? 명쾌하게 답을 할 수 있다면 우리들이 이렇게 살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토록 많은 종교가 있지도 않을 것이고.

 

사람이라는 존재를 요소로 분해할 수 없듯이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유나 살아가는 방식을 이거다라고 명확하게 분리해서 말할 수가 없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실시되어 인간 유전자 지도가 어느 정도 밝혀졌다고 하지만 인간을 유전자들로 이야기할 수 없듯이, 우리들은 다양한 요소들이 단순히 결합되는 것이 아니라 결합하면서 또다른 무엇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헤세 작품이 우리나라에 많이 알려져 있는데, 이 [황야의 이리]는 좀 낯설다.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 [지와 사랑], [유리알 유희]에 비해 덜 알려져 있다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사람 안에 있는 이성과 본능이라고 해야 할까? 아주 단순화 시키면 인간이 이성을 대표한다면 이리는 본능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교육을 통해 성장하면서 내 안에 있는 이리를 억누르고 길들인다.

 

그래서 자신의 본능과 이성이 충돌하기도 하지만, 본능에 따르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리라는 표현 자체가 이미 도덕적 판단 기준을 제시하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인간을 이성과 본능으로 양자택일 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인간이란 이성만으로도, 또 본능만으로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을 스펙트럼 상에 놓고 보면 맨 오른쪽에 이성을 놓고, 맨 왼쪽에 본능을 놓는다면 그 사이에 있는 수많은 지점들을 포함해서 모든 것이 인간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도 그런 말이 나온다. 자신이 두 부류가 아니라 수백 수천의 부류로 구성되어 있음을, 그래서 어느 하나로만 규정해서는 안 됨을.

 

불합리한 시대에 이성으로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너무도 힘들고 그렇다고 본능에 충실한 삶만을 추구하기도 힘든 시대. 그 사이에서 흔들리며 살아가는 존재가 현대인이라면, 불합리한 현실에 대응하는 우리 인간의 모습은 소설 속에 나타났듯이 웃을 수 있는 인간이다.

 

웃음은 현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거리를 제공한다. 웃음은 그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침잠하지 않고 현실을 비껴갈 수 있는 힘을 준다. 그래서 소설에서는 웃음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렇지만 웃을 수 있는 인간.

 

현실의 고통 속에서도 웃을 수 있는 인간은 강한 인간이다. 그런 인간이야 말로 우리가 추구하는 인간이다. 소설 속 하리 할러는 이성이 강한 삶을 살던 인간이었지만, 그는 점차 자신을 괴롭히고 있던 황야의 이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인정하게 된다. 이성과 본능. 황야의 이리는 억눌러야만 하는 존재로 여기고 살아왔던 그에게 본능의 힘을 일깨워주는 존재가 나타난다.

 

헤르미네. 본능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여인. 그에게서 하리는 자신을 본다. 그리고 헤르미네에 이끌려 본능의 세계에, 세속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다. 그가 비판해 마지 않았던 세계에서 그는 행복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한쪽에만 머물 수는 없다. 우리들 삶이 그렇다. 이성만이, 본능만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우리가 영원을 추구하는 것은 현실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현실에 거리를 두고 웃을 수 있는 인간. 즉 현실을 받아들이되 그것에 자신을 완전히 넘기지 않는 인간이다.

 

수많은 자신들의 조합으로 현실을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되는 존재. 그런 깨달음을 얻으면 그때부터는 이성과 본능이 양자택일을 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 둘과 그 사이에 있는 다양한 것들이 바로 자신임을, 현실을 살아가는 자신임을 하리 할러를 통해 헤세는 보여주고 있다.

 

지식인 사회에 속해 있던 하리 할러가 비판해 마지 않았던 세속의 세계 속에 발을 들여놓고, 억눌렀던 욕망들을 들여다보고, 이 현실에서 자신이 살아가야 함을, 그 현실을 웃음으로써 극복해 나갈 수 있음을, 그래서 자신 속의 황야의 이리와 함께 살아가야 함을 깨달아 가는 과정, 그 과정을 '수기'라는 형식을 통한 소설을 통해 우리도 함께 가고 있다.

 

소설은 하리 할러의 수기라는 제목 밑에 '미친 사람만 볼 것'이라는 작은 제목을 달아놓고 있다. 그리고 할러가 들어가는 마술 극장은 미친 사람만 입장 가능하고 입장료로 이성을 지불할 것이라고 되어 있다.

 

미친다는 것, 수많은 자아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수많은 자아를 볼 수 있는 사람은 현실이 변하지 않는 고정된 하나가 아니라 과거와 미래가 겹쳐져 있는 곳임을 깨닫는 사람, 그래서 고통 속에 허우적거리지만 그 고통도 웃음으로 떨쳐낼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소설 도입부에 편집자의 말에서 (이것 역시 소설의 일부다. 소설을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이게 하는 장치인 것이다) 하리 할러를 이렇게 평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소설을 통해서 이런 하리 할러를 만나고, 그 할러가 우리들 중 한 사람임을 인식하게 된다.

 

  할러는 두 시대 사이에 끼여 있는 자였고, 일체의 안정감과 순수함을 상실한 자였다. 인간의 삶이 지닌 모든 문제를 자신의 개인적인 고통과 지옥으로 승화시켜 체험하는 것 - 이것이 그의 숙명이었다.

  내가 보기에 그의 수기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의미는 바로 이 점에 있다. (36쪽)

 

자, 할러의 수기를 따라가 보자. 나는 어떤 존재인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내 안에 있는 이리를 나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