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유'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소유함이 없다다. 내가 가지고 있어도 내것이 아닌 것. 무소유는 물질의 문제가 아니라 의식의 문제다.

 

  마음의 문제다. 물질이 아니다. 그러니 무소유의 단계는 소유의 단계다. 이미 있는 것을 마음이 초월해 버린 것이다.

 

  결국 무소유의 단계는 충족, 풍요의 단계다. 마음은 이미 넘치고 넘쳐 더 이상 소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소유라는 말을 들으면 불교에서 볼 수 있는 그림, 십우도를 떠올린다.

 

  진리를 찾아 떠난다. 소유의 단계다. 진리를 찾는 것 자체가 이미 무소유가 아니다. 진리를 찾는다. 여기에 머물러도 소유의 단계다. 다시 떠나야 한다. 그래야만 무소유의 단계가 된다. 결국 무소유는 물질의 유무로 말해지지 않는다. 의식, 의지의 문제가 된다.

 

차라리 무소유의 단계는 행복한 단계다. 차라리가 아니라 진정 행복한 단계가 무소유의 단계다. 이런 무소유보다도 더 찬란한 것이 있다고 한다. 시인은 그렇게 말한다. 그것이 바로 극빈이라고. 극빈... 아예 없다. 소유할 물질 자체가 없다. 물질의 세계를 꿈도 꾸지 못한다. 가진 것이 없다. 바랄 것도 없다. 그야말로 텅 비어버렸다. 없다. 그것이다. 역설이다.

 

몇 년 전에 이런 말이 돌았다. 이부망천(離富亡川)이라고. 무슨 사자성어 같지만, 만들어낸 특정 지역을 비하하는 말. 이혼하면 부천, 망하면 인천이라는. 경제적으로 하위에 있는 사람들이 살려고 이주해 온 곳이라는 말이다.

 

이 말을 떠올린 것은 김영승 시인의 이 시집 '무소유보다도 찬란한 극빈'에서 그런 가난, 극빈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지독히도 가난한 삶. 그것도 시인은 이 시집에서 자신이 살고 있는 인천과 자신의 가족을 빈번하게 등장시키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시집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그 말도 안되는 사자성어 흉내낸 말이 떠오르게 된다.

 

오죽하면 그런 가난한 삶에서 느끼는 소소한 행복을 표현한 시를 '잘못 쓴 시'라고 하겠는가.

 

  잘못 쓴 시

 

내일은 한로

아름다운 날

또 보름 있으면 상강

검은 돌에 낟가리에

찬 이슬 내리겠네

하연 서리 포근하겠네

 

단풍 들고 눈 내리고

온누리 수레바퀴마저 꽝꽝

얼어붙으면

 

불 지피리 부지깽이 들고, 생솔가지 마른 장작

보릿짚 볏짚 마른 삭정이 탁탁

아궁이 앞에 앉아 고즈넉이

아랫목 화롯가에 앉아 그림자처럼

 

썰매 타러 나간 아들

기다리겠네

 

보글보글 된장국 뚝배기 올려놓고 귀신처럼

손끝 매운 고운 아내

 

바느질하겠네 뜨개질하겠네 쌩쌩 부는

겨울 바람

 

고구마 깎고 국수 삶고

 

얼음 깨고 얼개기를 뜨면 (얼개미 : '어레미-바닥의 구멍이 굵은 체'의 사투리) 

새까맣게 튀는 새뱅이 (새뱅이: '생이'의 사투리. 토하 土蝦)

 

초가지붕 처마 밑엔

고운 솜털 한 줌 참새,

 

밤은 깊겠네.

 

김영승, 무소유보다도 찬란한 극빈. 나남. 2013년 재판 1쇄. 21-22쪽.

 

한폭의 수채화를 보든 듯한 느낌을 준다. 가난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야말로 무소유의 단계다.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지내고 있는 단란한 가족의 모습. 목가적이다. 전원시라고 할 수 있는데, 제목이 '잘못 쓴 시'다.

 

현실은 절대로 이렇지 않다는 것. 무소유가 아니라 극빈이다. 가난하기에 이런 일이 없다. '월 175,300원의 그 임대료가 벌써 / 두 달째 밀렸네 / 말렸네 나를 말렸네 피를 / 말렸네, 극빈'('극빈' 중 일부. 52쪽)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삶에 고난에 찌들어 있는 상태인 것이다.

 

이런 가난은 시인이기에 겪는다고 하면 어느 정도는 맞지만 다 맞는 이야기는 아니다. 시인이 아니어도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려 해도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많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도 무소유의 경지가 아니라 극빈, 자신을 말리는 극빈의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많다.

 

시인은 그런 삶을 이 시집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 이런 목가적인, 참으로 따스하고 평화로운 느낌을 주는 시를 '잘못 쓴 시'라고 하지. 시인의 다른 시집 제목처럼 '반성'해야 한다.

 

누가? 바로 우리가... 우리 모두가. 극빈은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사회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극빈이 아니라 '무소유'의 경지를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할 책임은 바로 우리 모두에게 있다.

 

이런 의식을 하든 하지 않든 재난을 당한 사람들에게 기본적인 소득을 보전해주자는 논의가 일어나고 있다. 실제로 실행하는 지방도 있고. 적어도 사람들이 '극빈'에 처해 '말라가지 않도록' 하자는 데에 공감하고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위에 언급한 시가 '잘못 쓴 시'가 아니라 '잘 쓴 시'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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