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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도 좋게 딱 ㅣ 걷는사람 시인선 19
황형철 지음 / 걷는사람 / 2020년 1월
평점 :
때가 때인만큼 도대체 이렇게 어수선한 세상에서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자괴감. 과학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의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그만큼 부작용도 크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달리는 차를 거부할 수는 없으니, 적당한 제동장치를 마련해야 하는데...
그 제동장치에 대한 고민도 없이 그냥 발전이라는 환상에 휩싸여 있던 우리들의 뒤통수를 한 순간 바이러스가 또는 다른 것들이 친다. 사정없이. 이건 몰랐지 하면서. 너네 한번 당해봐라 하는 듯이.
몇 년 간격으로 '신종'이라는 이름을 단 바이러스들이, 질병들이 나오고 있다. 부작용이다. 항생제가 듣질 않는 슈퍼바이러스가 출현하고, 기존에 있던 바이러스들이 변종을 일으켜 기존 약으로는 잘 치료가 되지 않는 경우가 늘고 있다. 그것도 특정한 지역, 특정한 연령대에서만 일어나지 않고 전지구적으로, 전연령대에 걸쳐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런데, 한번 이런 일이 일어나면 그 반응은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에 집중한다. 누군가 책임을 져야 자신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듯이. 우리 모두가 책임을 져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이.
황형철 시집을 읽으며 제목 '사이도 좋게 딱'이란 자연스럽다는 말을 떠올렸다.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내 탓 네 탓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려움을 서로 보듬고 가는 것.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그것이 바로 자연의 일이고 사람의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함께 함. 시집에서 두 시가 지금 상황과 더불어 마음에 남았다. 물론 시인은 지금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겠지만... 시에서 그때 그때에 맞는 상황을 발견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니.
다저녁 무렵
"당신 원통함을 내가 아오
힘내소, 쓰러지지 마시오
5·18 엄마가 4·16 엄마에게" *(진도 팽목항의 어느 현수막에서)
기교나 수사 따위에
애써 공들이지 않아도 괜찮아
그저 분하고 답답한 마음 알아주는 것
내 일인 양 가슴이 저미어 다름없이 흔들리고
애틋하고 가엾이 생각하여 가만있지 못하는 것
정작 힘써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아 보탬 주는 것
시시하다 싶을지 모르지만
시란 그런 것
정치도 그런 것
황형철, 사이도 좋게 딱. 걷는사람. 2020년. 44쪽.
시가 그런 것이란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정치도 그런 것이라는 것은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잊고 있었는데, 이 시를 읽으며 다시 떠올리게 됐다.
그래 정치란 무엇인가? 어려운 사람, 분하고 답답한 마음이 있는 사람들 보듬어 주는 것 아니겠는가. 정치인이란 무엇인가. 바로 힘써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아 보탬을 주는 사람 아닌가. 네 탓 내 탓 공방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자연스런 정치인 아니겠는가.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 기교나 수사를 남발하는 말들을 할 필요가 없다. 그냥 정말로 '애틋하고 가엾이 생각하여 가만있지 못'해 어떤 일이라도 하는 사람, 조용히 안아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정치인이다. 그런 정치를 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흔히 하던 말인 '밥 한번 먹자'란 말을 쉽게 할 수 있어야 한다. 한가족이라도 함께 밥을 먹지 못하는 격리 대상자들에게 이 말, 밥 함께 먹자라는 말, 얼마나 가슴에 와닿는 말이겠는가.
밥 한번 먹자
거짓말은 아니지만
언제 밥 한번 먹자, 밥 한번 먹자
잘 지키지도 않는 공수표를 던지는 건
밥알처럼 찰지게 붙어살고 싶기 때문이지
단출한 밥상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것만으로
어느 틈에 허기가 사라지는 마법을
무엇이라 설명해야 할까
제아무리 공복이라도
뜸 들일 줄 알아야 밥맛이 좋듯
세상일은 기다려야 할 때가 있어
공연히 너를 기다리는 거야말로
너에게 가는 도중이라는 걸 알지
가지런히 숟가락 놓아주듯
허전한 마음 한구석도
네 옆에 슬쩍 내려두고서는
그랬구나 괜찮아 괜찮아
위로받고 싶기도 하거니와
모락모락 갓 지은 밥처럼
뜨거운 사람이고 싶기 때문이지
황형철, 사이도 좋게 딱. 걷는사람. 2020년. 23-24쪽.
식구(食口)라는 말. 함께 밥을 먹는 입. 그런 식구. 격리 대상자가 되면 식구라도 함께 밥을 먹지 못한다. 마주 앉아 따뜻한 밥을 함께 먹지 못한다. 하물며 식구가 아닌 사람임에랴. 그만큼 감염병은 우리에게 많은 제약을 준다.
지나가면서 인사치레로 했던 말. 언제 밥 한번 먹자. 이 말이 이렇게 소중한 말일 줄이야. 이 말이 이렇게 가슴에 와닿을 줄이야. 새로운 질병으로 밥을 같이 먹자는 말을 쉽게 할 수 없는 지금. 다시 예전처럼 '밥 한번 먹자'는 말을 자연스레 할 수 있는 때가 빨리 오기를... 식구들끼리 예전처럼 아무런 거리낌없이 함께 밥을 먹는 때가 오기를...
그래서 모두가 자연스레 사이도 좋게 딱 밥 한번 같이 먹는 일이 많아지기를...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인 지금... 봄은 봄이어야 하므로. 하루라도 빨리 우리들 생활에도 봄이 오기를... 황형철의 시집을 읽으며 마음을 다독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