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희 시집을 읽다. 시집을 읽으며 부사(어)를 이리도 잘 쓰는 시인이 있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시 제목에도 부사들이 많이 나오는데 대표적인 시들을 골라보면 다음과 같다.

 

  '하필'이란 말

  '이미'라는 말

  '이미'와 '아직' 사이

  차라리(里)에 가서

  차라리

 

어떤 시인이 말했다는 '시는 부사어를 사랑한다'(박상천의 '통사론'이란 시에 나오는 구절)라는 말이 연상되는 그런 시들이 많은데... 시는 말을 직설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다른 말을 집어넣어 표현하는 문학이라는 생각을 이 시집을 읽으면 자연스레 하게 된다.

 

수많은 부사어들의 향연, 그것이 김승희 시의 특징이 아닌가 싶은데... 그런 점에서 부사어는 한정된 의미를 좀더 넓게 확장해 주는 역할을 하지 않을까 한다.

 

반대로 부사어는 무한한 감정을 유한하게 정리해서 보여주는 역할도 하고. 즉 부사어를 통해 유한과 무한의 세계를 반복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미'와 '아직' 사이라는 시를 통해 우리는 단어의 의미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단어들이 내표하고 있는 깊고 넓은 세계를 볼 수 있게 된다. 부분만 인용하면 다음과 같은 표현들 속에 들어 있는 세계들...

 

누구에게나 시간은 그렇다오

이미와 아직 사이에 반딧불 같은 오늘이 있고

이미와 아직 사이에 캄캄한 밤의 절망이 있고

이미와 아직 사이에 내일의 불안이 있고

이미와 아직 사이에 파도치는 희망이 있고

이미와 아직 사이에 눈물 넘치는 오작교

 

김승희, '이미'와 '아직' 사이 3연. 134쪽에서) 

 

그렇다면 김승희의 시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유한한 세계에서 무한한 세계를 추구하는 사람의 모습. 즉 땅에 발을 딛고 있지만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의 모습이다.

 

제목이 된 시를 보자.

 

  도미는 도마 위에서

 

도미가 도마 위에 올랐네

도미는 도마 위에서

에이, 인생, 다 그런 거지 뭐,

건들거리고 산 적도 있었지,

삭발한 달이 파아랗게 내려다보고 있는 도마 위

도미

물방울이빨랫줄에조롱조롱

 

도미는 도마 위에서 맵시를 꾸며보려고 하지만

종말에 참고문헌과 각주가 소용이 될까?

비늘을 벗기고 보면 다 피 배인 연분홍 살결

그래도

고종명에 참고문헌과 각주가 소용이 되느니

물방울이빨랫줄에조롱조롱

 

도마가 도미 위에서

도미가 도마 위에서

몸서리치는 눈부신 몸부림

부질없는 꼬리로

도마를 한번 탕 치고 맥없이 떨어져

보랏빛 향 그윽한 산천

물방울이빨랫줄에조롱조롱

 

김승희, 도미는 도마 위에서. 난다. 2017년. 124-125쪽

 

이 시에서 '그래도'라는 부사가 나온다. 아마 김승희 시 중에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를 떠올리게 하는 시어이기도 한데, 유한한 곧 생명이 끊길 존재에게 참고문헌과 각주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 참고문헌과 각주를 부사어라고 한다면, 우리 인생을 꾸며주던 다양한 삶들의 결이라면, '그래도' 유한한 존재인 우리에게 이런 참고문헌과 각주가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삶이란 단순명료한 어떤 것이 아니라 다양하게 표현되고 실현되는 그 무엇이라는, 따라서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만의 삶이 있고 그 삶은 곧 우주만큼이나 광활한 것이라는 것, 도마 위에 올라온 도미는 유한한 생을 마감하려 하지만, 그 마감 속에서도 안으로는 다양한 삶들을 쟁여 놓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 시를 통해 내 삶에 더 많은 참고문헌, 각주들을 집어넣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새해 그런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 시집 읽기. 그래 내 삶에도 다양한 '부사어'들이 덧붙여져야겠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