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말이 있다. 사람의 몸도 마찬가지다. 대칭이다. 좌우가 있다. 어느 한쪽이 기울어지면 중심이 잡히지 않는다. 중심을 잡기 위해서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사람 몸만 그런 것이 아니다. 세상일도 대칭이 된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쪽과 저쪽이 있으며, 할 일이 있으면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 그래서 세상은 쌍이다. 짝이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짝이 쌍이 없는 세상은 너무도 삭막하다.

 

(중심만 너무 비대해도 그렇다. 몸통만 살찐 새를 생각해 보라. 날 수가 없다. 그러니 몸통을 중심으로 좌우 날개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중심을 잡기 위해서는 짝, 쌍이 있어야 한다.)

 

  동양철학에서 음양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21세기 인공지능의 세상에 디지털이란 것도 0과 1의 짝이 아니던가. 이런 짝을 잃으면 짝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중심이 잡힌다.

 

  짝을 잃었을 때 슬픔을 느낀다. 상실을 깨닫는 것, 슬픔이 일어나는 것, 그것은 슬픔을 이겨내려는 행동을 한다.

 

시인은 시집 처음을 '슬픔에게'란 시로 시작한다. 마치 정호승이 슬픔의 시인이라는 소리를 듣지만, 그가 이야기하는 것은 희망임을 연상시키는 그런 시로. 시 첫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무지 때문이 아니라 / 희망에서 비롯된다 모든 슬픔은 ('슬픔에게' 1연)

 

 그렇다면 희망은 무엇인가? 바라는 것이 없는 상태, 부재 상태를 인식하는 것, 따라서 지금 없는 존재를 있게 하려는 바람, 이것이 바로 희망이다. 그러니 희망은 슬픔을 동반한다. 다른 말로 하면 슬픔은 희망이다.

 

그래서 시인은 시의 마지막 연에서 '부디 오래오래 머물러다오, 슬픔 너는 / 희망의 다른 이름 아니더냐'('슬픔에게' 4연)라고 하고 있다.

 

슬픔과 희망의 짝. 얼핏 희망은 기쁨과 연결시키는 경우가 많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슬픔에서 희망이 나온다. 희망에서 슬픔이 나온다. 아직 오지 않은 것, 아직 내게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슬픔은 현재에서 미래를 생각하고, 희망은 미래에서 현재를 움직이게 한다.

 

짝이다. 쌍이다. 희망과 슬픔의 짝. 우리들 삶을 구성하는 짝. 이 시집에서 이런 짝을 만난다. 없는 것을 만들어 중심을 잡는 행위. 그것이 바로 희망이다. '어떤 중심'이란 시다.

 

     어떤 중심

 

읍내 주점에서 술을 마시다 잠시 밖으로 나와

길가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는데

자꾸 앞으로 넘어진다

술 탓인가 몇 번이고 자세를 고쳐 앉지만

여전히 몸 전체가 왼쪽으로 쏟아진다

몽롱히 살펴보니 왼쪽 다리 하나가 없는 의자,

왼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니 비로소

다리 네 개의 의자가 된다

 

왼 다리가 내 몸의 중심이었다니

 

권혁소, 우리가 너무 가엾다. 삶창. 2019년. 107쪽.

 

한쪽을 없애버리려 아둥바둥 대면, 자신도 중심을 잃고 쓰러진다. 왼쪽의 부재는 오른쪽의 부재를 불어온다. 결국 넘어질 수밖에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넘어지지 않으려면, 중심을 잡으려면 짝이 있어야 한다.

 

왼쪽에는 오른쪽이, 오른쪽에는 왼쪽이. 한쪽이 없으면 슬픔이 인다. 자꾸 넘어질 수밖에 없으니 슬플 수밖에. 그래서 희망한다. 한쪽이 있게 되기를, 중심을 잡게 되기를.

 

왼쪽이 없으면 왼쪽을 만들어야 한다. 오른쪽이 온전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어째, 자꾸 우리는 너무 왼쪽을 없애려고만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시인은 왼쪽이 얼마나 무시당했는지 '왼쪽에 대한 편견(98-99쪽)'이라는 시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많이 쓰지 않았는데도 먼저 망가져버린 왼쪽에 대해서. 단지 왼쪽만이 아니라 몸이 망가져 버린다는 사실을 시를 통해 알려주고 있다.

 

슬픔과 희망, 짝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세상은 짝, 쌍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생각하게 하는 시집이다. 읽으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시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

 

덧글

 

출판사에서 보내준 시집이다. 읽으며 마음이 훈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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