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된 시집을 읽다. 1989년에 나온 시집이니 벌써 30년 전이다. (처음은 1989년에 나왔지만 내가 읽은 시집은 1996년에 인쇄된 10쇄본이다. 많이 찍어낸 것을 보면 꾸준히 읽혔다는 얘기다)
30년. 강산이 세 번 바뀐다는 그 긴 세월. 그러나 시는 30년 정도는 거뜬히 버텨야 한다. 30년도 못 버티는 시가 어떻게 우리 곁에 살아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
황조가나 서동요 같은 아주 오래 된 시가 지금도 우리 곁에 있는데, 겨우 30년이라니... 윤동주 시나 김소월 시도, 또 육사의 시도, 백석의 시도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데...
그런데 30년 전 시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을까? 아주 오래 전 시는 기억하고 있는데, 또 60-70년대 시 중에 몇은 기억하고 있는데, 80년대 후반부터 나온 시들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그렇다.
시하고 멀어진 생활을 하기도 했고, 시를 읽으면서도 마음이 아니라 머리로 읽은 경우가 많아서, 기억력이 떨어지면서 시가 마음이 아니라 머리에서부터 먼저 사라진 이유도 있을 것이다.
또 시들이 너무 어려워졌다는, 도무지 시인들의 잠꼬대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내 삶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시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시가 삶에서 멀어지게 된 것이 꼭 독자 때문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최승자의 세번째 시집을 읽으면서 다시 30년 전에 나온 이 시집을 읽으며 시인은(또는 시는) 어떠해야 하나를 생각한다.
시인은 '詩 혹은 길 닦기'라는 시에서 시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시로 이야기하는 시론(시인론)이라고 할 수 있다.
詩 혹은 길 닦기
그래, 나는 용감하게,
또 꺾일지도 모를 그런 생각에 도달한다.
詩는 그나마 길이다.
아직 열리지 않은,
내가 닦아나가야 할 길이다.
아니 길 닦기이다.
내가 닦아나가 다른 길들과
만나야 할 길 닦기이다.
길을 만들며,
길의 흔적을 남기며,
이 길이 다른 누구의 길과 만나길 바라며,
이 길이 너무나 멀리
혼자 나가는 길이 아니길 바라며,
누군가 섭섭지 않을 만큼만
가까이 따라와주길 바라며.
최승자, 기억의 집. 문학과지성사. 1996년 초판 10쇄. 13쪽.
이게 바로 시다. 또 시인이다. 결코 혼자 가서는 안 된다. 시는 만나야 한다. 누군가 따라오게 해야 한다. 그래야 시가 계속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런 시들, 계속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