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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자화상 - 화가의 가슴에서 꺼내온 가장 내밀한 고백
박홍순 지음 / 서해문집 / 2018년 6월
평점 :
자신의 감정을 차분히 들여다 볼 시간이 별로 없다. 바쁘게 산다는 핑계로, 또는 온갖 스마트 기기들의 도움(?)으로 심심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심심할 시간이 없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차분하게 관조할 시간을 마련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바꿀 수 있다.
그냥 엄청난 속도로 시간을 보내고, 자신의 감정도 그렇게 흘려보내고 만다. 감정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중요한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이성보다는 더 소홀하게 여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이성이 하던 역할을 인공지능이 많이 하게 되었다. 인공지능이 인간 지능을 넘어선 지는 오래 되었지만, 아직까지 인간이 지닌 감정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감정은 아직 인간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감정을 더 소중히 다뤄야 하지 않겠는가. 이 책은 화가들이 그린 자화상을 통해 감정을 들여다보게 해주고 있다. 자화상을 통해 화가들의 감정만이 아니라 우리가 느끼는 감정들에 대해 생각하게 헤주고 있다.
책을 시작하기 전에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감정을 깊이 있게 이해하려면 무엇보다 회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감정의 속살과 대면하고 정당한 자리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감정과의 은밀한 만남을 위한 가장 적절한 안내자는 자화상과 소설이다. 자화상은 감정을 표현하는 풍부한 표정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이면에 화가가 직접 겪은 삶의 내력까지 스며들어 있기에 친밀한 만남을 주선한다. 소설은 다양한 인간 군상이 등장하고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생겨나는 다양한 고뇌와 갈등이 펼쳐져 넓고 깊은 감정의 수원지 역할을 한다. 자화상과 소설에는 살아 움직이는 숨결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으로 생생한 간접경험을 제공한다. (6쪽)
그래서 이 책에서는 자화상과 그와 관련된 소설이 또는 시가 등장한다. 우리들의 감정을 이해하는 작품들인 것이다. 자기 감정을 언어로 표현 못할 때가 많다. 언어로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감정을 차분히 들여다보지 못했다는 말이다.
자기 감정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대략 이렇다고만 표현하고 만 것. 또는 표현도 못하고 지나쳤던 것. 어떤 감정들이 있을까? 저자는 이 책에서 많은 감정들을 제시하고 있다.
분열, 기만, 연민, 절망, 욕구, 상상, 열망, 투영, 허무, 수용, 우월, 울분, 상실, 고독, 공포, 인내, 결벽, 일탈
이런 감정들을 표현한 자화상과 작품을 들고 있다. 이 책을 통해서 그런 감정들을 만나고, 그것들을 통해서 자신을 더 넓고 깊이 있게 알아가는 기회를 마련하면 된다. 책을 읽기 전에 어떤 화가와 또 어떤 작품(소설이든 시든)을 연결시킬 수 있는지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처음에 나오는 감정이 '분열'인데, 이 감정에 대해서 에곤 실레의 자화상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에곤 실레의 자화상에는 하나의 인물만 나오지 않는다. 둘 또는 셋이 나오는 경우도 있다. 자화상인데 한 화면에 둘이나 셋이 나온다. 그 인물들이 모두 화가인 것이다. 그러니 분열일 수밖에.
그러나 우리를 하나로 규정할 수 있을까? 사람이 하나의 감정만 지니고 사는가? 그 사람을 단 하나의 언어로만 표현할 수 있는가. 적어도 사람에게는 둘 이상의 모습이 함께 있지 않은가. 어떨 때 저 사람이 내가 아는 사람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을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이 만나지 않나.
자신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지 않나. 그러므로 이런 감정의 자화상을 통해서 다양한 감정들을 만나면서, 나를 이루고 있는 수많은 감정들에 대해 생각해야 하지 않나. 에곤 실레의 자화상을 들면서 이렇게 시작한다. 그렇다면 문학작품은?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들고 있다. 내가 어릴 적에는 '지와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읽은 작품. 다양한 나를 성찰하게 하는 작품.
이렇게 감정과 자화상과 문학을 연결짓고 있는데, 꼭 저자의 의견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 이런 감정에 해당하는 자화상과 문학을 찾아보는 것도 좋다. 그런 찾기를 통해서 자기 감정을 더 잘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게 될 테니까 말이다.
이 책에서 계속 남아 있는 자화상은 아르테미시아의 자화상이다. 여성이다. 그렇다면 어떤 감정과 연결이 될까? '울분'이다. 여성으로서 당할 수밖에 없었던 고난, 사회의 비난, 그럼에도 당당하게 살아간 사람. 유딧(또는 유디트)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을 그린 화가. 그가 겪었던 일이 아직도 진행 중이라면? 이 화가의 자화상과 어울리는 문학 작품은? 토마스 하디가 쓴 '테스'다.
21세기에 들어서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 자화상을 통해서 사람의 내면으로만 침잠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회로 확산시킬 수도 있음을 이 장을 통해서 알게 된다. 자화상은 사람의 내면만이 아니라 사회 문제까지 성찰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이 책은 그 점을 잘 드러내 주고 있고, 그래서 감정과 사회 문제를 함께 생각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많은 자화상들을 감상할 수 있고, 여기에 따른 문학작품까지 소개 받고 있으니 일석이조인 책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