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솔아 시집을 읽으며 이상하게 '이상'이 떠올랐다. 이상이 쓴 '오감도' 무슨 내용인지 해석하기가 힘들고, 괴기스러운, 그러나 근대를 맞이한 인간들이 느끼는 불안을 잘 표현했다고(누군가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오감도, 앞이 보이지 않는 불확실한 시대의 두려움이라고) 하는데, 읽는 사람 입장에서야 어디 이것을 시라고 할 수 있겠는가.

 

  당시 사람들이 이상에게 반발한 이유도 알 것 같다. 그들에게 이상의 시는 당최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는 시에 불과한, 한마디로 정신이상자의 넋두리였을 테니까.

 

  그런데 이런 이상의 작품과 비슷한 작품들이 최근 시인들에 의해서 많이 창작되고 있다. '난해시, 전위시'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우리 곁으로 다가오려고 했는데, 이상의 시가 근대를 이해하는 열쇠 역할을 하려고 했다면, 현대 시인들의 시는 인공지능 시대, 인간의 삶이 더욱 불확실 시대를 여는 열쇠 역할을 하려고 하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한다.

 

열쇠는 있는데, 마치 수많은 자물쇠를 가져다 놓고 열쇠에 맞는 자물쇠를 찾아봐 하는 식이란 생각이 들어서 씁쓸하기만 하지만.

 

한 번에 열 수 있는 자물쇠를 찾는 사람을 천재라고 해야 하나? 백 개의 자물쇠를 주고, 열쇠는 단 하나, 열지 못하는 사람을 보고 능력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한 번에 아니 서너 번에 연 사람을 실력보다는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운칠기삼이라더니, 시를 읽는데 이런 말이 통용이 된다면 문제가 있지 않나.

 

열쇠라는 말이 생각난 이유는 시집에 있는 '시인의 말'때문이다.

 

언니가 열쇠라는 것만 알았지./방 열쇠를 나눠 가지면 된다는 걸 나는 몰랐어. //내 방에선 끔찍한 다툼들이 얽혀/겨우겨우 박자를 만들어내.//언니는 말했지. 이런 세계는 풀 수 없는 암호 같고,/그런 건 낙서만큼의 가치도 없다고.//그건 얼마나 옳은 생각인지.//언니와 나 사이에 사는 사람들과/열쇠를 나누어 가지면 좋을 텐데.//2017년 3월 / 솔아가

 

열쇠를 나누어 갖기 위해서 시인은 시를 쓴다. 시인에게 시는 방을 여는 열쇠일 수 있다. 그 열쇠를 다른 사람과 나누어 갖고 싶다고 하는데, 시인이 나누어 준 열쇠가 열쇠인지 모르고 있다면 그 무슨 소용이랴.

 

하지만 시인이 나누어준 열쇠는 문을 여는 열쇠가 아니라, 즉 만능열쇠가 아니라 이 세상이 어떻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인식의 열쇠일 테니... 세상은 암흑으로 가득 차 있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불확실성의 세계이며, 그 세계 속에서 우리는 길을 잃고 헤맬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 열쇠는 우리 스스로가 찾아야 한다는 것을 시인이 말해주고 있는 것 아닐까? 두 시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아홉 살

 

  도시를 만드는

  게임을 하고는 했다. 나무를 심고 호수를 만들고 빌딩을 세우고 도로를

 

  확장했다. 나의 시민들은

  성실했다. 지루해지면

 

  아이 하나를 집어 호수에

  빠뜨렸다. 살려주세요

 

  외치는 아이가 얼마나 버티는지

  구경했다. 살아 나온 아이를 간혹은

 

  살려주었고

  다시 집어 간혹은 물에 빠뜨렸다. 아이를

  아무리 죽여도 도시는 조용했다.

  나는 빌딩에 불을

 

  놓았다.

  허리케인을 만들고 전염병을 퍼뜨리고 UFO를 소환해서 정갈한 도로들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선량한 시민들은 머리에 불이 붙은 채 비명을 지르며

 

  뛰어다녔다. 내 도시 바깥으로 도망쳤다. 나는 도시를 벽으로

  둘러쌌다. 그러나 모든 것을

 

  태우지는 않았다.

  나의 시민들이 다시 도시를 세울 수 있을 정도로만 나는 도시를

  망가뜨렸다. 더 놀고 싶었기 때문에. 더 오래 게임을 하고 싶었으니까. 나는 나의

 

  시민들에게 미안하지

  않다. 아무래도

 

  미안하지가 않다.

  약간의 사고와 불행은 나의 시민들을 더 성실하게 했다.

 

임솔아, 괴괴한 날씨와 착은 사람들. 문학과지성사. 2017년. 41-43쪽.

 

아이들 장난을 빗대어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이 아닐까 한다.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이 세상.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세상이 아무리 불확실하고 어두워도 사람들은 성실하게 살아간다. 그것이 세상을 지금까지 버티게 하는 힘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이 이렇게 된 것이 마치 아홉 살짜리의 게임과 같다면,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 세상은 겨우 아홉 살이 만든 세상에 불과하므로.

 

그럼에도 세상은 예측할 수가 없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 아니, 내가 말하는 순간 세상은 내 말로 인해 또 변하고, 내가 행동하는 순간 내 행동으로 인해 또 변한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와 같은 세상. 도무지 확정할 수 없는 세상인 것이다.

 

예보

 

나는 날씨를 말하는 사람 같다.

 

봄이 오면 봄이 왔다고 비가 오면 비가 온다고 전한다.

 

이곳과 그곳의 날씨는 대체로 같고 대체로 다르다. 그래서 날씨를 전한다.

 

날씨를 전하는 동안에도 날씨는 어딘가로 가고 있다.

 

날씨 이야기가 도착하는 동안에도 내게 새로운 날씨가 도착한다.

 

이곳은 얼마나 많은 날씨들이 살까.

 

뙤약볕이 떨어지는 운동장과 새까맣게 우거진 삼나무 숲과

 

가장자리부터 얼어가는 저수지와 빈 유모차에 의지해 걷는 노인과

 

종종 착한 사람 같다는 말을 듣는다.

 

못된 사람이라는 말과 대체로 같고 대체로 다르다.

 

나의 선의는 같은 말만 반복한다. 미래 시제로 점철된 예보처럼 되풀이해서 말한다.

 

선의는 잘 차려입고 기꺼이 걱정하고 기꺼이 경고한다. 미소를 머금고 나를 감금한다.

 

창문을 연다. 안에 고인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을 창밖으로 민다.

 

오늘 날씨 좋다.

 

임솔아.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문학과지성사. 2017년. 16-17쪽.

  

이런 예보처럼 도대체 확실한 것이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간다. 불확실하기 때문에 서로를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내 예보가 이것일 수도 저것일 수도 있는 늘 미래 시제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미래 시제는 결국 추측 아니던가. 그러니 내가 착한 사람이라는 말은 못된 사람이라는 말의 다른 면일 수 있는 것이다.

 

착하다는 말을 하는 순간 이미 못된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래서 완전히 착하지도 않고 완전히 못되지도 않은 그렇게 섞여 있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 유폐되어 살아갈 수는 없다. 밖으로 나가야 한다. 밖으로 나가 서로 어울려야 한다. 그런 어울림이 일어날 때 '오늘 날씨 좋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불확실한 세상,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답은 없다. 우리는 그냥 서로 부딪치면서 살아갈 뿐이다. 그렇게 부딪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착한 사람들이다. 이 시는 불확실한 세상에서도 우리는 밖으로 나가 살아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열쇠를 주고 싶다고 했는데, 나는 시인이 주고 있는 것이 열쇠인지도 모르고 있는 상태다. 아니 열쇠임을 알아도 맞는 자물쇠를, 열 수 있는 문을 못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 이 열쇠가 무슨 소용이람. 시인의 말에서처럼 '낙서만큼의 가치도 없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참, 어려운 시다. 난해하다. 시인은 열쇠를 주고자 하나, 나는 열쇠를 받아도 쓰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지금 우리 세상은 정말로 북확실하다. 불확정성의 세계다. 우리는 그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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