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작가의 말로 시작하고 싶다. "이 소설은 내 소설이다"라고 제목을 쓴 작가의 말. 작가는 '소설을 쓰는 것이 한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라 믿었던 때가 있었다.' (171쪽)고 했다. 그는 창조주가 되어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창조하고, 사람들이 그가 창조한 세계에서 거닐기를 바라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다 어느날 자신이 창조주임에는 확실한데, 참 한심한 창조주라는 것을 깨닫는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마르코 폴로처럼 아무도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여행하는 것에 가깝다.' (171쪽)고 말하고 있다. 먼저 문을 열어주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또 그들이 떠나라고 하면 언제든지 떠나야 하는 여행자. 그런 여행자는 자신의 경험을 다른 세계의 한계 속에서만 할 수 있다. 소설가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작가는 이렇게 또 말하고 있다.

 

'소설가라는 존재는 의외로 자율성이 적다. 첫 문장을 쓰면 그 문장에 지배되고, 한 인물이 등장하면 그 인물을 따라야 한다. 소설의 끝에 도달하면 작가의 자율성은 0에 수렴한다. 마지막 문장은 앞에 써놓은 그 어떤 문장에도 위배되지 않을 문장이어야 한다.' (171-172쪽)

 

여기까지 작가의 말을 따라가니 이상하게 작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독자에 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독자 역시 소설을 읽으며 자신이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 있다고 느끼고, 그 세계 속에서 또다른 자신을 발견한다고 생각하지만, 철두철미하게 소설 속 인물이나 사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

 

작가는 그럼에도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내 소설이다. 내가 써야 한다. 나밖에 쓸 수 없다.' (172쪽)

 

독자 역시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내가 읽는 소설이다. 내가 읽어야 한다. 나만의 방식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소설은 독자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소설가에게 소설이 자신의 것이듯 독자에게도 소설은 자신의 것이어야 한다. 그렇게 소설을 읽어야 한다. 이렇게 장황하게 작가의 말을 인용한 것은, 너무도 잘 읽히는 이 소설이 도대체 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기억을 잃어버리는 살인자... 수많은 사람을 죽였지만, 어느 순간 살인의 세계에서 물러나 딸을 키우며 살아가던 살인자. 그러다 자신이 치매에 걸렸다는 것을 알고, 또다시 연쇄살인이 일어나는 마을에서 자신의 딸을 지키고자 하는 살인자.

 

과거의 살인자가 현재 살인자로부터 딸을 지키려고 한다. 그것도 자신이 죽인 부부의 딸을. 그는 마지막으로 살인을 기획한다. 딸을 지키기 위한 살인. 과거의 살인은 철저히 자신을 위한 살인이었다면 이번에 계획한 살인은 딸을 위한, 즉 남을 위한 살인이다.

 

그런데... 소설은 반전을 이룬다. 그에게 딸이 있었던가. 연쇄살인은 일어나고, 그에 대한 진실은 소설 후반부에 가면 밝혀진다. 그렇다. 기억을 잃어간다고 해도, 자신의 몸이 기억하고 있는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행위를 기억하지 못할 뿐, 행위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을 아무리 없는 것(無)으로 돌리려 해도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 다만, 기억하지 못할 뿐, 발견하지 못할 뿐이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그래서 기억하기 위해 글로 쓰거나 녹음을 하는 기억 장치들을 동원한다. 그런 장치들 역시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만 남긴다는 것을 알고 있는 우리는, 이런 기록들도 믿을 것이 못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런 장치들로 기억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는 소설을 읽어가면 알 수 있다. 또한 기억을 잃어가는 것이 자신의 행위를 지워가는 일이 될 수 없음을 알아가게 된다. 온전하지 못한 정신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기억을 하지 못할 뿐이다. 내면에 들어 있는 습성들이 어느 순간 터져 나오게 되는 것, 그런 행동을 하기 위해서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사건들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것.

 

사람은 무(無) 다시 무(無)돌아간다고 하지만, 처음의 무와 마지막의 무가 같을 수는 없다. 우리가 공(空)들어야 한다는 것은 바로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처음을 극복한 공(空)이 되어야 한다.

 

소설에 나오는 반야심경이나 금강경의 내용은 제자리 걸음을 하는, 또는 단순히 부정을 하는 무나 공이 아니다. 그것은 치열한 고민, 삶을 거쳐 깨달아야 하는 경지다. 그런 경지에 든 다음에 다시 자신이 있던 위치로 오는 것, 부처가 중생을 구제하러 세상으로 나오고, 예수가 민중들 속으로 들어가듯이 그래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깨우침인데,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망상 속에서 얻어지는 깨우침은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다. 행동이 변하지 않는,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는 공에 대한 추구는 제자리 걸음일 수밖에 없다.

 

이 소설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꽤나 스릴 넘치고 반전이 있는 이 소설을 불교의 십우도에 비유하면 결국 무에서 무로 가는 과정인데, 십우도가 한 차원에서 다른 차원으로 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라면, 이 소설은 이 과정이 아닌 오로지 제자리 걸음을 하는, 망상 속에서만 다른 차원으로 가게 되는, 현실과 자신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상태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늘 같은 나같지만, 결코 같은 나가 아님을, 나는 망상 속에서만 달라진 나를 발견할 것인지, 아니면 현실에서 달라진 나를 발견할 것인지 고민해야 함을 소설이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술술 읽히는 소설이다. 재미도 있고. 그렇지만 무언가를 더 생각하게 하는, 찜찜한 여운이 남는 소설이기도 하다. 나는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고 생각하게 하는, 그러한 찜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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